하노이의 날씨는 화려하다
21년 7월 15일 목요일
집 안에 들어오는 햇빛의 양이 줄었다. 구름이 늘어난 건가?
최근 며칠 동안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구름이 잔뜩 자리 잡아 흐린 저기압 상태로, 몇 가지의 고민들이 낳은 스트레스가 배를 콕콕 찌르며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다. 나는 무심하게 굴었다. 모른 척 대꾸하지 않았다. 그 무심함이 괘씸했는지 모른 척할 수 없도록 더 큰 고통을 주었다. 무방비한 상태로 편하게 누운 나는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밤새 쓰린 배를 부여잡은 채 끙끙거렸다. 결국 서랍 맨 위에 넣어둔 상비약을 꺼내 먹었고 언제 그랬냐는 듯 통증은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것이 몸인지, 마음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좋지 않았다.
문득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더 이상 하락세를 칠 수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려 빠르게 회복하고 싶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딱 하나였다.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이럴 땐 역시 고기다.
무더운 날씨에 지지 않기 위해 하늘하늘하고 얇은, 그리고 길지 않은 검정 원피스를 입었다. 신발은 구멍이 숭숭 나있는 검은색 에나멜 샌들로 신었다. 마무리로 지난밤 감고 잔 덕분에 한층 더 부스스함을 자랑하는 머리를 가리기 위해 회색 벙거지 모자를 얹었다. 제법 소녀스러운 차림이 될 뻔했는데 모자가 이를 망쳐놨다. 하지만 아쉽지 않았다. 이곳에선 내가 어떤 옷을 어떻게 입고 다니든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으며 알아볼 사람도 없으니 괜찮았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됐다.
로비로 나와 3칸의 계단을 내려간 후 오른쪽 방향으로 건물 따라 곧장 걸어가면 마트가 있다. 지난 4개월 동안 수십 번을 이렇게 마트에 갔다. 이 길 말고는 없는 줄 알았는데 며칠 전에 지름길을 발견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왼쪽 통로로 걸어가다 보면 다소 허름해 보이는 문이 있다. 그 문을 열면 마트가 보인다. 녹아내릴 것 같은 더위를 조금이나마 피해서 갈 수 있는 유용한 지름길이다.
오늘은 그 지름길로 가보기로 했다. 조금 어두운 긴 통로를 터벅터벅 걸어 투박한 하얀 문을 열었다. 문 뒤로 환한 빛이 쏟아졌고 이내 파랗고 푸르스름한 것들이 보였다.
파란 하늘과 초록빛 나무가 화려하게 펼쳐졌다.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게 한 이 선명한 화려함은 무채색으로 온몸을 둘러싼 나와 극명하게 상반되어 더욱 빛나 보였다. 한참을 가만히 푸르름을 눈에 담으려고 애썼다.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은 경이로운 감정을 느끼게 하고 의미 없던 하루를 특별하게 한다. 집 앞 마트 가는 길에 등장한 이 생각지도 못한 광경은 오늘 하루의 전부가 되었다.
나의 저기압은 고기 앞에서가 아닌 일상 속 하노이의 화려한 풍경 앞에서 해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