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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츠심 Aug 27. 2021

가방을 얻고 손가락을 잃었다

손뜨개를 하고 나니 글을 쓸 수 없다


요 근래 며칠 동안 손뜨개에 푹 빠져 가방을 세 개나 만들었다. 손뜨개 처음 하는 초보 주제에 의욕이 엄청났다. 단지 나는 예쁜 가방을 가지고 싶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아주 단순한 이유로 미친 듯이 뜨개질을 했고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이걸 원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내 계획엔 없던 것도 함께 얻어냈다. 그것은 엄지손가락의 통증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시작한 첫날에는 손목이 좀 뻐근했다. 두꺼운 실로 팽팽하게 뜨려니 자꾸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더불어 세 번을 연속으로 꼬아 만들어야 하는 무늬가 대부분인지라 쉴 새 없이 손목을 돌려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손목이 안 아프면 이상하다. 굉장히 무리가 가는 동작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는 더 이상 이십대가 아니다. 이렇게 저렇게 몸을 굴려대도 멀쩡한 이십대가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군데 한 군데가 시큰거리기 시작한 삼십대이다. 주제도 모르고 손목을 미친 듯이 돌려대면 당연히 아픈 삼십대이다.

얘가 그 세 번 꼬아 만드는 무늬



쓸만한 몸뚱이가 아니구나

내 신경은 손목에 집중되어 있어 엄지손가락이 아픈지 몰랐다. 손뜨개를 시작한 첫날 파스 한 겹을 큼지막하게 붙이고 시원 쌉싸름한 냄새에 코가 마비되어 잠들었다. 다음날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본 결과 통증이 없었다. 말끔히 나았다. 아직 쓸만한 삼십대의 몸뚱이구나 안심했다. 다만 엄지손가락이 잘 구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심지어 왼쪽 엄지손가락과 크기가 다른 게 한눈에 보일 정도로 부었다. 쓸만한 몸뚱이가 아니구나 절망했다.


어린 시절부터 이 엄지손가락은 다소 문제가 있는 아이였다. 그림을 그리던 고등학생 시절부터 말썽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직업병 같은 거라고 했다. 별문제 없으니 알아서 관리 잘해라 이런 말이겠지. 이후에도 칼질을 오래 하거나 글씨를 오래 쓰면 엄지손가락이 아팠다. 그 엄지손가락이 결국 가방 세 개를 만들고 앓아누웠다. 미련한 주인 만난 탓에 드러누웠다

얘네가 그 가방 세 개



글은 손맛인데

손가락이 아프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없다. 음료 뚜껑이 잘 안 열리고 휴대폰 스크롤을 내리기 어려우며 가위로 파를 쫑쫑 썰어낼 수 없고 글씨를 개발새발 쓰게 된다는 점 말고는 문제가 없다. 문제가 되진 않으나 아쉽다.


보통 피시로 글을 쓰기 전에 노트에 쓰고 싶은 내용을 한 문장씩 쭉 적어낸다. 손맛이라고 할까? 단 몇 자라도 노트에 적은 후 쓴 글은 확실히 더 맛깔나고 명확하다. 어릴 때부터 글씨를 꾹꾹 눌러 쓰는 습관이 있어 문장들을 쭉 적어내고 나면 뒷면이 우둘투둘해진다. 그걸 손끝으로 만지는 느낌이 참 좋다. 그래서 노트에 자꾸 글을 적어보게 된다. 내용 정리가 되는 점도 좋지만 자꾸만 그 촉감을 기대하며 꾹꾹 적어내게 된다.

하지만 엄지손가락이 망가지니 펜을 잡는 것부터 어렵다. 당연히 그 촉감은 만질 수 없다. 어제도, 오늘도 꾹꾹 눌러쓰기를 실패했다. 개발새발 적힌 글씨를 읽고 있자니 뭐 한 건가 싶다. 그나마 키보드를 사용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어 천만다행이다. 하지만 아쉽다. 손맛이 아쉽다. 글을 쓰고 싶다.



엄마한테는 비밀이야

며칠이 지난 지금은 처음보다 붓기가 많이 빠졌고 제법 잘 구부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통증은 남아있다. 이번 주말까지 경과를 지켜보고 통증이 지속된다면 병원을 가봐야겠다. 나는 이미 코 뼈에 금이 간 것도, 발가락이 부러진 것도 모른 채 지나간 둔한 이력이 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엄마에게 욕을 된통 얻어먹었다. 통증에 크게 예민한 편이 아니라 스윽 지나가버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위로 아닌 위로해 주셨다. 다행히도 코 뼈와 발가락의 뼈는 이십대의 뛰어난 회복력으로 잘 붙어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사실 조금 있지만 사는 데 문제없다. 이번엔 미련하게 지나치지 말아야지.


가방 세 개가 뭐라고 손가락이 망가져 글 쓰는데 지장을 주나.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웃기다. 그 와중에 글씨 쓰는 게 어려워진 것이 가장 중요하고 아쉬운 포인트인 게 더 웃기다. 통증에 무딘 것이 문제일까, 지나친 집착이 문제일까. 아님 슬슬 몸이 고장 나기 시작한 나이의 문제일까? 아마도 세 가지 모두 함께 작용했겠지. 엄마한테 욕먹을까 봐 말도 못 했다. 부디 빠른 시일 내에 완쾌하길 바란다 손가락아.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나가자.

왼쪽은 잘 살아있습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격정적으로 내렸다.

아파트 무너지는 줄 알았다.

21년 8월 26일 목요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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