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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츠심 Sep 09. 2021

아직 널 보낼 수 없어 가지 마

애석하게 슬픈 코로나 시대의 여름

혹시 가을이니?

가을이 온 것일까?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타들어갈 것 같던 쨍한 햇빛은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여느 때와 같이 민소매를 입고 외출했다가 서늘한 바람이 피부에 맞닿아 놀랬다.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하노이에서 처음 느껴보는 세한 느낌이다. 가을이 오는 건가? 난 아직 민소매를 보내줄 수 없는데? 아직 옷장엔 입지 못한 민소매 원피스가 두벌이나 있는데 혹시 가을이 오는 건가?


하루 종일 돌아가던 에어컨이 오늘 밤엔 멈췄다. 처음으로 에어컨을 켜지 않은 밤이다. 에어컨이 꺼진 집안의 온도는 29도에 웃돌았다. 30도가 넘지 않는다. 낯선 온도다. 그리고 제법 시원한 온도다. 살랑거리는 선풍기 바람으로 충분한 밤이라니, 정말 가을이 오는 건가? 그런 건가?



안돼, 가지 마.

코로나로 물놀이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한 여름이다. 한국보다 길고 뜨거운 여름, 한국보다 저렴한 호텔과 리조트 그러나 한국보다 엄격한 코로나 통제로 청량한 물놀이는커녕 몇 달째 방구석에서 에어컨 바람과 함께였다. 덕분일까? 동남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머쓱하도록 피부가 하얗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하얗다.

내가 생각한 하노이의 여름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수영복 한 번 못 입고 물놀이 한 번 못해보고 여름을 떠나보내려니 아쉽다. 아니, 아쉽다는 말로는 모자라다. 속상하고 서운하고 섭섭하다. 이건 도대체 누구에 대한 원망인가. 어디에도 표현할 수 없는 이 감정들을 남겨둔 채 지금도 여름은 슬금슬금 가고 있다.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중이다. 여름은 자꾸만 이제 가야 한다고 연신 손을 흔드는데 나는 웃으며 배웅해줄 수 없다. 나는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 안돼, 가지 마. 보낼 수 없어. 아직은 아니야.



핑계 대는 거 맞아

생전 처음 접해보는 하노이의 더위에 지치고 지겨워 가을이 오길 바랬었던 나인데, 막상 가을이 오려하니 그 지긋지긋한 여름을 보내기 싫어졌다. 질척대는 이 마음을 숨길 수 없다.  

더 이상 이마에 땀이 송골하게 맺히지 않아 좋겠지만, 더 이상 소매가 없는 옷은 입을 수 없다.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로 다니는 것도 어려워지겠지. 빨래도 잘 마르지 않을 거고. 씻고 나오면 온몸에 닭살이 돋아 바들바들 떨며 물기를 닦아내게 되겠군 으으. 시원한 에어컨 바람 대신 뜨겁고 건조한 히터 바람과 하루를 가득 보낼 것이며, 얼굴에 발라야 할 화장품의 개수도 늘어나겠지. 자기 전에 전기담요도 살뜰히 틀어야겠고.

새로운 계절이 오는 것은 언제나 설레고 반가운 일이었는데 귀찮은 일이 가득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런 기분은 또 살면서 처음이네. 그토록 핑계를 싫어하는 내가 핑계를 만든다. 그러니까 가지 마. 코로나는 보내줄 수 있지만 넌 아직 아니라고.



여름 못 잃어

여름이 끝나는 게 아쉬워서 뭐라도 꼬투리 잡고 싶은 못된 심보가 나온다. 꽤나 기대했던 여름이 허무하게 지나가는 이 순간 고약한 마음씨는 자꾸만 커진다. 사실 이것은 변변찮은 질척임이겠지. 가을이 오는 게 이상할 일이 아닌 9월이다. 그럼에도 하노이는 다르겠지, 하노이의 여름은 길겠지, 한국보단 천천히 오겠지. 다르기를 바란다.

바램이 자꾸 간절해진다. 10월까지는 여름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 아니, 10월까지는 여름이었으면 좋겠다. 아직 여름을 보낼 수 없다. 충분히 즐기지 못한 하노이의 여름이 두고두고 떠오를까 겁이 난다. 혹시 가을이 오고 있는 게 맞다면 나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기 바란다. 나는 아직 여름과 함께 하고 싶은 게 많으니 말이다.

애석하게도 마음만 까맣게 타버린 이상한 여름이다. 발 빠르게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는 코로나를 탓해야 할까, 내 마음도 모른 채 떠나가는 눈치 없는 여름을 원망해야 할까. 이런 속상한 여름은 또 처음입니다.




소나기가 몇 번 내렸다.

그중 한 번은 우산이 없어 맞았다. 소나기의 묘미라고 치자.

21년 9월 8일 수요일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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