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심신 단련 | 이슬아
얼마 전 방송 프로그램에 나온 나영석 PD가 오랫동안 같이 방송을 해온 강호동이 노랗게 분장을 하고 코끼리 코를 돌고 있는 모습을 보며 우스꽝스럽다가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대단한 사람이 대단해 보였거든요? 근데 요즘은 오랫동안 꾸준히 한 사람이 너무너무 대단해 보이는 거예요."
성공가도를 달리다가 주저앉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단련'의 길 아닐까.
문득, 단련이라는 글자를 찾아보았다.
단련(鍛鍊)
명사
1 쇠붙이를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단단하게 함.
2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함.
3 어떤 일을 반복하여 익숙하게 됨. 또는 그렇게 함.
단련이라고 하면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불에 달궈진 무른 쇠붙이를 단단하게 하려면 계속해서 두드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다.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번째 뜻처럼 어떤 일을 꾸준히 반복하여 익숙하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심신단련'을 읽는 동안 꾸준히 몸과 마음, 생활을 돌보는 작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꾸준함이 가장 어려운 것을 요즘 들어 크게 느끼는데, 특히나 외부의 강제가 없는 프리랜서 작가로서의 삶은 본인이 스스로 꾸준함을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생활에 쉽게 지배당하지 않을까싶다.
매일 독자들에게 글을 써서 보내는 '일간 이슬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아침마다 스트레칭을 하는 모습들에서 하루하루 일상의 몸과 마음을 정성스럽게 가꿔나가는 부지런한 그의 삶과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마음을 단련하는 건 어떤 것일까. 마음이 단단하려면, 반듯하게 서려면 무엇보다 홀로 잘 서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리액션하지 않는 시간. 타인의 욕망에 응하지 않는 시간"을 강조하고, 새해 다짐을 '웃기지 않으면 웃지 말자'로 정하고, 스마트폰에 의지하지 않는 시간을 설정해두는 그녀는 누구보다 주변인들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사랑하지만 스스로 '혼자'임을 생각하고 본인만의 심지를 다듬는다. 이 모든 작업은 주위의 일상을 '흐리멍덩'하게 보내지 않기 위한 그녀만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법' 같았다.
'공부를 하는 이유가 머릿속에 지식을 밀어 넣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해상도를 올리기 위함이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심신 단련'을 읽다 보면 조금 더 일상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느낌이랄까. '단련'의 가장 큰 힘은 '꾸준함'에서 나옴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배우는 시간이다.
트레이너는 하하하! 하고 웃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새해 다짐 중 하나가 '안 웃기면 웃지 말자'이기 때문이다. p.29
"혼자 하겠습니다. 안 잡아주셔도 됩니다."
"아, 예..."
그럼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간격이 벌어진다. 나는 그 상태가 딱 좋다. 어색해지는 것은 두렵지 않다. p.32
가면 갈수록 뺄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엉덩이가 강조되는 자세의 운동을 특히 자주 시켰다. 체형상 어떤 자세를 해도 엉덩이가 강조되니까 기분 탓일 수도 있다. 기분 탓인지 아닌지를 돌아보는 일은 익숙하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내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문제가 아니다. 명확한 불쾌함은 드물다. 그보다 잦은 건 애매한 불쾌감이다. 나는 돈을 내고 운동을 배우면서까지 불쾌의 정도를 살피는 것이 몹시 번거롭게 느껴졌다. p.34
개수대에서 청소기 내부를 씻고 닦으며 숨은 먼지를 제거했다. 기계나 집이나 인간이나 항상성을 유지하려면 품이 든다. p.52
아픈 애보다 먼저 잠드는 것에 대해 해명하고 싶었다. 나는 정말 잘 먹고 잘 자야 된다고. 그래야 내일도 지치지 않고 즐겁게 병원에 머물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너무 졸려서 입이 안 열렸다. 집에서처럼 하마가 나를 재워서 병원인 걸 까먹은 채로 잤다. 우리는 적당히 서로의 언덕에 기대어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p. 70
복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 엄마가 나한테 하는 것에 비하면, 내가 너한테 주는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나는 존자랑 복희 때문에 혀를 내두른다. 그 여자들만큼 할 자신은 없다. 기필코 그보다는 덜 열심히 살고 싶다.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씨만 물려받고 싶다. p.97
복희는 맞은편에 앉아 내 모든 얘기를 들어주었지만 정신은 딴 데 가 있는 듯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기 인생을 손에 쥐고 있지 않은 사람의 얼굴 같았다고. 이제 와서 나는 생각한다. p. 98
이어지는 밤과 새벽과 아침. 그리고 다시 만나는 복희. 지금이라고 인생이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나. 사실 영영 불가능하지 않나. 그저 이 날들을 흐리멍덩하게 흘려보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일지 모른다. 또다시 잃어버린 시절로 기억하지 않기 위해 복희와 먹고 얘기하고 걷고 만나는 순간을 이렇게 적는다. p. 101
고마워,라고 말하고 싶지만 너무 졸려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일은 하마한테 못다 한 얘기를 해야지. '길을 걷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그댄 나에게 사랑을 건네준 사람'이니까 고마움도 죄책감도 말해야지. 내일은 새로운 우리가 되어야지. p. 116
교육을 담당한 동양고전 선생님은 말했다. 평화란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생명과 물건과 몸과 마음이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이라고. 그건 이 작은 대안학교의 모토이기도 했다. p. 128
어떤 교사는 임과 준의 이름을 정확히 지칭하는 대신 '약한 친구'라고 에둘러 말했다. 약한 친구들에게 폭력적인 말을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나는 약하다는 말에 약했다. 이제는 안다. 약하다는 말은 강하다는 말만큼이나 소중히 내뱉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p. 153
네 시간은 너무 길어서 숙쌤과의 일들을 죄다 회상하고도 남았다. 기억이 제멋대로 밀려왔다. p.165
스물여덟 살의 나와 쉰세 살의 복희는 저 멀리 산에 핀 꽃나무들을 바라보며 고속도로를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다음 날 복희는 허리 몸살이 났다. 내 허리는 뜀박질을 한 판 하고 왔더니 괜찮았다. 어쨌든 우리 모두 숙쌤의 나이를 향해 쉬지 않고 가는 중이었다. p. 170
반면 그 무렵의 희는 눌변인 편이었고 왠지 집에 돌아가는 길에 혼자서 마음속으로 대화를 복기할 것 같았다. 하고 싶은데 타이밍을 놓쳐서 못한 말. 타이밍이 돌아왔을 때 이상하게 해 버린 말. 바로 같았던 말. 혹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더 빠르고 똑똑하게 대신 내뱉던 남의 말. 그런 대화의 복기를 하다가 멍해져서 차를 놓칠지도 몰랐다. p. 181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황은 중요한 일엔 얼마든지 능숙하며 중요하지 않은 일엔 맘 편히 미숙하다. p. 184.
양손에 찬물을 받아 얼굴로 끼얹는 그 여자를 생각한다. 언제든 물을 묻힐 수 있는 얼굴. 어느 역에서의 세수든 아무래도 좋은 얼굴. 집에서나 바깥에서나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 핸드 드라이어 앞에서 가볍게 바람을 쐬며 물기를 날려 보내는 얼굴. 그 얼굴의 자유와 생기를 생각하면 기분이 좋다. 나도 여차하면 지하철에서 세수를 해도 상관없는 사람이고 싶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로 걷는 사람이고 싶기도 한다. 손에 든 게 없으면 양팔을 가볍게 흔들며 산책할 수 있다. 저녁마다 어깨를 곧게 펴고 먼 곳을 바라보고 오래 걷는 인생을 살고 싶다. p.197
외출 전에 입는 옷과 가방에 챙기는 것들은 결국 그 하루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와 염려이므로. 아침마다 나는 점심과 저녁을 예측하며 옷을 골라 입는다. 꼭 필요한 물건뿐 아니라 왠지 필요할 듯한 물건도 가방에 챙긴다. 여기서 기대와 염려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몸도 짐도 무거워진다.
노트북을 챙기면 밖에서도 많은 일을 할 거라는 기대. 책을 두 권 넣으면 더 질 좋은 원고를 완성할 거라는 기대. 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염려. 저녁에 급작스러운 데이트 약속이 잡힐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 데이트 직전에 변덕스레 옷을 갈아입고 싶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잘 보내고 싶은 하루일수록 가방 속은 어수선해진다. p. 198
이 시 같은 만남을 겪으려면 어떤 바깥사람이 되어야 할지 조금은 알겠다. 어디서든 찬물로 세수를 하고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물기를 닦는 사람들. 어디로든 가고 어디에나 털썩 주저앉을 수 있는 사람들. 인생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잊지 않는 사람들. 커다란 사랑과 증오와 열정과 불안과 조심 없이도 계속 흐르는 사람들. p. 202
여러 전전긍긍을 집에 두고 현관을 나선다. 이런저런 역사를 품은 몸, 어리석고 지혜로운 이 몸을 믿으며 걷는다. 몸은 하루의 무수한 가능성들을 어떻게든 맞이하고 감당할 것이다. p. 203
시즌1을 통해 내가 매일 쓸 수도 있는 사람이란 걸 처음으로 믿게 되었다. 윗몸일으키기 횟수를 늘리듯 꾸준히 훈련하면 쓰는 근육도 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도 뜨겁게 달궈졌다. 매일 좋은 글이 완성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좋은 글을 쓸 확률이 높아지기는 했다. p. 217
누구를 모셔오든 나의 필터로 통과시키는 것일 테니까 정말 좋은 필터가 되도록 애쓰겠다. 좋은 필터를 장착한 플랫폼으로 성장하기를 꿈꾼다. 내가 구독하는 문예지들의 훌륭한 점들을 닮아가고 싶다. 내가 읽는 작가들의 훌륭한 점들을 닮아가고 싶다. 여러 장르를 시도해보며 내가 잘 쓸 수 있는 영역을 넓혀가고 싶다. p.217
하루는 그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현대인의 리액션에 관한 글이 있더라고요. 요약하자면 이래요. "현대인은 하루 종일 리액션이라는 것을 하면서 산다. 리액션이라는 것은 '타인의 욕망에 응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이 행위에 몰두하면 할수록 나 자신의 욕망은 점점 거부되고 잊힐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리액션하지 않는 시간을 꼭 확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요. 리액션하지 않는 시간. 타인의 욕망에 응하지 않는 시간. p. 257.
하지만 스마트폰과 나의 생계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이 일상을 크게 바꾸기가 어려워 보인다. 이 현재를 유감스러워하는 나에게 한 친구가 앱 하나를 알려주었다. 'Forest'라는 앱이다... 스마트폰을 덜 쓰기 위해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야 한다는 점이 매우 이상하지만, 이걸 손에서 30분 떼는 것도 어려워하게 된 나에게 좋은 치료가 된다. 이 앱은 내 고독의 매뉴얼 중 하나가 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책 읽는 시간이 늘었다는 점이다. p. 260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오랜만에 내 것 같았다.
쉴 새 없이 연결된, 정보가 범람하는, 모두가 서두르는, 이런 세상에서는 무엇과 연결되느냐 보다도 무엇을 차단하느냐가 더 중요한 정체성일지도 모르겠다. p. 262
안 하는 게 점점 늘어난다. p. 263
평타라는 말을 우습게 생각했는데 2년째 일간 연재를 해보니 날마다 평타라도 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전국 노래자랑>의 송해 선생님이나 별 관심 없던 라디오의 오래된 DJ의 꾸준함 같은 것을 존경하게 된다. p. 266
웅이가 내 일을 얼마나 응원하고 존중하는지를 튼튼한 책상에서 본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그냥 알아진다. 책상은 나에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 일할 용기를 준다. 약속을 거절할 용기와 미움받을 용기와 빈 화면을 마주할 용기와 남에게 자질구레한 하소연하지 않을 용기를 말이다. p. 267
메이 사튼의 '혼자 산다는 것'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혼자 여기서, 마침내 다시 나의 '진짜' 삶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이상한 점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캐보고 알아보는 혼자만의 시간이 없는 한,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열렬한 사랑조차도 내 진짜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메이 사튼과 비슷한 모습으로 늙어간 내 모습을 상상해본다. 소중한 사랑과 우정을 진짜 내 삶으로 만들려면 꼭 혼자의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건 이상하고도 가혹하고도 재미있는 진리다. 더 제대로 연결되기 위해 차단하는 연결도 있는 것이다. 나는 많은 것을 안 하며 점점 지루한 사람이 되어가는 동시에 소나무 책상에 기대어 어디로든 가는 유랑을 연습하며 지낸다. p. 268
그러자 새삼 내가 '허비'라는 것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실감 났다. 시간이든 돈이든 뭐든 헛되이 쓰는 느낌을 아주 불안해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헛된 구석이 하나도 없는 하루가 가능하기나 한가. p. 276
나이를 먹어도 모르는 것을 계속 배우고 살고 싶다고 하마는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 계속해서 겸손하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어 진다. 내가 모르는 것과 배워야 할 것이 세상천지에 널려있으니까. 편견도 잘 갈고닦고 싶었다. 사실 꽤 많은 편견이 우리를 돕는다. 판단의 시간을 단축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일들은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판단을 좀 미루고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이 간단하지 않으므로 편견도 뭉툭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이제 막 태어난 사람처럼 무구하게 세계를 감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함께 본 영화에서는 이런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p.308
사랑을 하는 동안에는 나쁜 일이 자신을 온통 뒤덮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나쁜 일이 나쁜 일로 끝나지 않도록 애썼다. 우리가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고 어떤 일에서든 고마운 점을 찾아내는 이들임을 기억했다. 사랑은 불행을 막지 못하지만 회복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사랑은 마음에 탄력을 준다. 심신을 고무줄처럼 늘어나게도 하고 돌아오게도 한다. p.309
그 용기로 나는 어떤 일에서 더 이상 물러서지 않는다. 미안하지 않으면 사과하지 않고 웃기지 않으면 웃지 않는다. 웃길 때 웃음을 참지 않듯 가슴이 아플 때 충분히 운다. 하마 눈에 비친 내 모습이 얼마나 나약하고도 강인했는지 까먹지 않는 한 쭉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를 놓치고 나서도 서로에게서 배운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다. p. 309
하지만 그런 청탁을 받을 때마다 상대방에게 매번 단정하고 힘센 언어로 정확한 원고료와 강연료를 알지 못하면 자신이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를 답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 나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p. 316
그가 즐겨 쓰는 표현대로 결정적인 순간에 좀 더 부지런할 뿐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체력이, 아주 많은 성의가 필요하다. 아주 많은 성의가, 아주 많은 체력이 필요하다. p.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