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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Jan 14. 2021

[1일] 새로운 길 달리기

지도 없이 달리기


0. 들어가며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걸 해보자. 그게 설령 작고 미미한 일일지라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 건 정세랑 작가님 덕분이다. 한 프로그램에 나와 '독특한 상상력'의 비결에 대해 묻는 말에 작가님은 "하루에 하나씩 새로운 걸 해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지낸다고 말했다. 그 '한 가지는' 꼭 새로운 도전이거나 거창할 필요가 없다. 작가의 말대로 새로운 과자를 먹어보거나, 가보지 않은 길 산책하기, 낯선 분야의 책 읽기는 일상의 큰 도전이라기 보다는 작은 변화이다. 하지만 이런 습관은 작가로서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TvN <유 퀴즈 온더 블록 - 정세랑 편>

오늘 아침에 한 작은 제안을 받았다. 새로운 일로 활력이 생길 수도 있겠으나, 생각 많은 나는 일단 고민해본다고 하다가 기회를 훌훌 날려버렸다.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무엇이든 고민부터 하고 보는 내 습관이 후회를 만들었다. 정세랑 작가는 "하고 후회하는 게 안 하고 후회하는 것 같다. 실패는 그 자체로 남는 게 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일에 열려있지 못하고 망설이고 시간을 보내는 것도 어쩌면 내 습관일 지 모른다." 작고 새로운 일들을 해보는 것 자체를 하나의 습관으로 만들자" 생각해보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면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벽을 좀 더 낮출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꾸준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물론 일상의 꾸준한 습관도 중요하다. 아침 독서, 운동뿐 아니라 일기 쓰기 등 모두 꾸준히 하는 건 보람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몸과 마음의 자산이다. 여기서 루틴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김연수 작가의 <시절일기> 에는 잘못된 일을 꾸준히 할 때의 문제를 이야기한 대목이 있다. "자신에게 익숙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결코 본인의 실력은 나아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법은 있다. "자신이 옳다는 느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습관적인 행동에서 벗어나고, 같은 걸 하더라도 익숙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보고,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아들여 제대로 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매일 새로운 일을 해보는 것. 달리 말하면, 꾸준히 하는 일상의 작은 습관들 중에 다른 각도로 바라보고, 익숙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보는 일이 될 것이다.      


작은 도전을 매일매일

매일 새로운 일을 하나씩 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새로운 일의 부피를 줄이고 생각하기로 했다. 몸도, 마음의 부담도 적어져야 가볍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태어났을 땐 매일이 도전이었다. 혼자서 서기, 옷 입고 단추 채우기, 젓가락질 하기, 세수하기처럼 지금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 모두 다 도전의 연속이었다. 무구한 아이의 시선과 감각을 생각하며, 매일 의식하고 새로운 일들을 조금씩 해 나가보려 한다.      


매일 하루는 새롭게 주어진다. 그 일상을 내가 조금이라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자칫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지 않을까. 작은 것부터 새롭게 해 보는 일,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조금이라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다르게 마음먹으며 작심하루의 첫 날을 보낸다.           




[1일] 새로운 것 하기. 첫날은 '새로운 길 달리기'이다.


무작정 새로운 것을 선택하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조금 새롭게 해 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주로 동네 주변에서만 뛰고 있는데, 며칠간 한파 때문에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날이 풀린 오늘은 달리기 좋은 날씨다. 길은 이미 녹아있었다. 


주로 달리는 길은 정해져 있다. 크게 세 코스 정도이다. 먼저, A코스는 집 앞 백화점 코스이다. 백화점을 둘러싸고 주차장과 공터가 있어 한 바퀴를 돌면 2km정도 된다. 컨디션에 따라 두 바퀴 또는 세 바퀴 정도를 그리고 나면, 내가 달린 길은 철(凸) 모양으로 지도에 표시된다. 다음으로, B코스는 공원 코스이다. 집 앞에서 2km 거리를 뛰어가면, 작은 호수가 나온다. 철새 서식지라 새들도 구경하고, 집 앞 코스가 답답할 때 뛰러 온다. 세 번째는 C코스, 산둘레길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데, 둘레길에는 오르내리막이 있어서 생각보다 난코스이다. 여름에는 나무가 주위 길에 우거져있어 덥지 않아 뛰기에 좋다. 이 세 코스는 지도를 미리 보고, 호수와 산, 집 앞 중심으로 거리를 셈해보고, 검색을 해서 찾은 곳이었다. 아직 다른 코스는 발견하지 못했다. 


지도 없이 가보자. 오늘 새로운 달리기 목표였다. 목적지를 향해서 뛰는 게 아니라 일단 5km 정도 아무 데나 뛰자고 생각하고 집을 나왔다. 정 가다가 돌아오는 길을 모를 때, 그때 지도를 보거나 길을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5km 거리는 집을 못 찾을 정도로 먼 거리는 아니니까'라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모르면 직진이다. 계속 앞으로 뛰었다. 보통 뛸 때에는 속도를 의식하곤 했다. 이번에는 속도 대신 주위를 둘러보며 뛰기로 했다. 뛰다 보니 하천이 나오고, 어쩌다 시장에 들어섰다. 따뜻한 날씨에 오랜만에 외출하는 건지, 아니면 5일장이라도 선 날인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상을 살아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천천히 뛰었다. 시장에 갇혔다고 생각하던 찰나, 멀리서 건축물 하나가 보였다. 차 타고 지나다닐 때 본 곳이었다. 인파를 피해 그쪽으로 달렸다. 오늘은 어쩌다 보니 도심 달리기 코스다. 

뛰다 보니 예쁜 빵집이 보였다. '오늘은 새로운 거 해보는 날'이니까,라고 스스로 핑곗거리를 대며 빵집에 들어섰다. 무화과 깜빠뉴와 대파 스콘을 샀다. 빈 손에 빵 봉지가 생겼다. 새로운 길로 달린 날 받은 선물 같아서, 신나는 마음에 주위를 달렸다. 익숙한 거리가 나왔다. 차로만 와본 곳이었는데, 아무 데나 달리다 보니 길이 이어져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는 원래 달리던 C코스가 나오는 길이었다. 내가 점으로만 알던 곳곳이 달리다 보니 선으로 그려졌다. 대학시절, 종각역에서 종로3가역을 지하철 타고 갔던 때가 기억났다. 길을 모른다는 생각에 선택지가 없었는데, 이후 조금만 걸어가다 보면 마주했던 역을 보고 눈이 트인 기분이었다. 오늘 역시 직접 밟고 돌아다닌 길 덕분에 동네 모습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새로운 걸 경험하는 건 지식을 밀어 넣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의 해상도를 올리기 위함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오늘 몸소 아무 데나 달린 덕분에 내비게이션으로만 찾던 지역을, 지도도 안 보고 두 발로 갈 수 있게 됐고 낯선 동네는 조금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헤매고 걸었던 길이 달리던 중에 생각났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서울로 올라온 나는 부푼 마음에 서울을 느껴본다며 지도 없이 무작정 걸었다. 걷다 보면 대로변이 나오고 남대문에 도착할 줄 알았던 무구했던 시절이었다. 길을 잃을까 두려워 중간중간 표지판도 기억하며 걸어서 도착한 동네는 학교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새로운 길을 가는 것만으로도 반짝이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새로운 길을 가봤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지도 없이 헤매는 시간이 있어 주위를 자주 둘러볼 수 있었으니까. 주위를 둘러본 덕에 맛있는 빵집을 발견했으니 그걸로 좋았다. 몸은 풀렸으니, 내일은 조금 더 새로운 내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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