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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Jan 17. 2021

[4일] 식물킬러, 레몬 씨앗을 심다

레몬나무를 꿈꾸며

아버지는 식물계의 미다스의 손이다.


40년 가까이 배 과수원을 하신 내공으로 사과며 귤이며 온갖 과실수를 뚝딱뚝딱 키워낸다. 줄기를 가져다 땅에 심어도 가을엔 단맛 가득한 과일나무가 자라나고, 죽어가는 선인장을 친척들이 가져오면 거실 천장에 키가 닿을 정도로 건강하게 키워낸다. 무심한 듯 척척 식물을 키워내는 원예 박사와는 달리 나는 식물계의 마이너스 손이다.   


처음 정성을 쏟았던 건 로즈메리였다. 화사한 봄날, 꽃집 앞에 내놓은 로즈메리는 제 몸이 살짝 흔들릴 때면 상쾌한 향을 뿜어냈다. 어둡고 적막한 독서실에 제격이었다. 독서실에 초록빛을 내뿜는 로즈메리를 들였다. 비좁은 공간에 향기가 돌았다.      


로즈메리는 물을 자주 주어야 한다고 했다. 햇빛, 물, 바람. 식물을 피우는 데 가장 중요한 3요소라고 했다. 독서실 밖에 자주 내어주고 신경을 써주었다. 하지만 향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학교 시험이 눈앞에 닥쳤고, 늘 그렇듯 며칠간 벼락치기에 온 힘을 쏟고 고개를 올려다보니, 책상 한편에 로즈메리는 수명을 다해 있었다. 식물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여리고 여린 허브를 키우려 했다니. 반성했다. 그리고 한동안 식물을 욕심내지 않았다.


어느 날, 선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멕시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두 팔 달린 선인장처럼 생긴, 미니 사이즈의 용신목이었다.  선인장이라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나 같은 식물 킬러가 키울 수 있는 식물 종류는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선인장은 유일한 선택지였다. 멀리 화훼단지에 나가 작고 귀여운 용신목을 사 왔다. 두 팔이 난 용신목은 가격이 훌쩍 뛰는데, 주머니 사정으로 두 팔이 나지 않은 어린 용신목을 데려왔다. ‘정성스레 키우면 언젠가 두 팔이 나올 거야.’ 두 팔이 없는 작은 선인장은 그 자체로는 오이 같았다. 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인연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4년 정도 길렀는데, 자라고 있지 않은 것 같아도 처음 사진과 비교해보면 몸도 통통해지고 길이도 어느새 쑤욱 자랐다. 하지만 두 팔은 뻗지 않았다.

 어느 날부턴가 점점 녹색이 짙어졌다.

 ‘툭’

 방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책장 선반에 있던 선인장의 몸이 그대로 부러져 바닥으로 낙하한 것이다. 과습이었는지, 몸이 물렁해져 제 몸을 못 가눈 선인장이 그대로 부러졌다. 부족한 주인을 만나 스트레스를 받다가 제 몸을 던진 게 아닌지, 죄책감이 들었다.      


작은 식물들은 너무 섬세하다.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신혼집에 집들이 선물로 화분을 받았다. 크루시아라는 큰 화분이었다. 이제는 나무다. 물 주기를 잊지 않기 위해 어플을 깔았다. 물주는 날짜에 알람을 해주는 어플이었다. 잊지 않고 물을 주고 햇빛을 쐬어주었다. 잘 자라던 날들도 잠시, 잎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아버지께 sos를 요청했다.

"흙을 만져보고 물을 주어야 해."

그랬다. 거실의 습도, 햇빛에 따라 물 주기를 달리했어야 했는데, 인터넷을 찾아보고 기계적으로 적용한 게 문제가 됐다. 3줄기였던 나무는 2줄기로, 1줄기로 줄었고, 마침내 커다란 빈 화분만 남았다.      


식물은 결국 동물이다. <녹색 동물>이라는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식물은 정적이고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다. 의외로 역동적이고 적극적이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 같아도, 날씨가 좋을 때면 제 잎사귀를 활짝 펴고, 줄기를 한 껏 뻗어나간다. 오래전 음료 캔 같은 걸 받은 적이 있다. 그 안엔 톱밥이 들어있었는데, 물만 주면 된다고 쓰여있었다. 물을 주고 난 후,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흙을 들춰내고 씨앗이 연둣빛 고개를 내밀었다. 저녁에 퇴근하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것처럼, 내가 볼 때는 멈춰있는 것만 같았는데, 줄기가 옆으로 옆으로 자랐다. 그때서야 알았다. '식물도 내가 모르는 이 순간에 열심히 제 몸을 정말로 움직이고 있구나'라고 말이다.      


그래서 씨앗을 틔워보기로 했다. 씨앗이 흙을 들추고, 머리를 불쑥 내미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이미 자라고 있는 식물의 성장을 두 눈으로 직관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어린 씨앗은 거대한 생명력으로 하루하루가 다르게 중력과 싸우고 몸을 키워나간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하나 남은 레몬이 있었다. 레몬 씨앗이 언젠가 레몬 나무가 될 날을 기다리며, 레몬 씨앗 발아에 도전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레몬 발아하기

레몬 씨앗 껍질을 정성스럽게 벗겨낸다. 연둣빛 씨앗이 나올 때까지 껍질을 벗겨낸다.

종이컵에 담은 물(25도 내외) 과산화수소를 한두 방울 떨어뜨린다. 발아를 촉진시킨다 한다.

레몬 씨앗을 담가 한나절을 보내준다

흙(상토)을 담고, 물을 준 다음 구멍을 낸다.

씨앗을 심고 흙을 덮어준다.

2~3주 기다린다.     


반으로 갈라져버린 씨앗도 흙에 심었다. 발아하는 데 문제없다고 한다. 사실 씨앗은 제 몸이 갈라져야 새싹이라는 새로운 얼굴을 밖으로 내보일 테다. 제 몸을 부수어 흙을 밀어내고 잎을 틔우는 새싹을 상상해본다. 마음속에선 벌써 레몬나무가 향기를 내뿜고 쑥쑥 자라서 레몬이 주렁주렁 열리는 꿈을 꿔본다.


이제부턴 기다림이다. 모든 일에는 시간이 걸린다. 씨앗도 제 몸을 틔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다. 조급해 하지 말아야지. 시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 곧 만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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