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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Jan 15. 2021

[2일] 서예, 붓글씨를 쓴다는 것

심신단련


어린 시절, 붓글씨를 써 본 기억이 있다. 선생님은 나와 친구 한 명을 콕 집어 서예를 배워서 대회를 나가보라 했다. 한창 뛰어놀고 싶은데, 가만히 앉아서 글씨를 써야 하는 운명이었다. 용감했던 친구는 창문으로 도망쳤고, 불만도 표하지 못했던 수줍은 나는 홀로 남아 준비를 해야 했다. 할아버지 선생님은 의욕이 넘쳤고, 아버지는 멀리 화방 거리를 찾아가서 화선지를 한 가득 사다 주셨다. 계속 같은 글씨를 쓰고 또 썼다  실력이 나아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한 장을 반듯한 글씨로 채우면 기쁘다가도, 다음 장에선 틀리기 일쑤였다. 한 번 쓰면 지울 수 없는 게 답답하기만 했다.      


아버지는 마음부터 곧게 하라고 일러주셨다. 전지를 받아 들고 여섯줄가량의 긴 문장을 처음 쓴 날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절반이 지날 무렵, 한 글자가 삐뚤어지면서 도미노처럼 다음 글자부터는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맘에 들지 않아서 종이를 구겨버리고 싶었는데, 끝까지 일단 써보자고 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붓을 고쳐 들고 울먹이면서 남은 글씨를 적었다. 그 종이는 지금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붓글씨가 됐다. 비록 잘못 써서 맘에 들지 않고, 실망해도 끝까지 붓을 놓지 않는 것, 인내심의 싹이 이때 조금 텄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 해 노란 최우수 상장을 아버지께 전했고, 초등학교 복도에는 오랫동안 내 글씨가 걸려있었다.   

   

붓글씨가 다시 생각난 건 작년의 일이다. 마음이 붕 뜬 것 같아서 고민할 때, 서예가 떠올랐다. 화방을 찾았다. 기억을 더듬어 붓, 먹물, 화선지, 벼루와 기초 교본을 샀다. 기초부터 다시 써보자 생각했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먼지만 쌓여갔다. 오늘은 일단 시작해보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첫 글자를 떼기도 전부터 화선지에 먹물이 뚝 떨어졌다. 시작이 좋지 않다. 마음을 고쳐먹고 ‘곧은마음 바른글씨’라고 적어 내려갔다. 화선지의 앞 뒤가 어디인지, 화선지를 접는 법은 무엇이었는지, 자음 모음은 어떻게 쓰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 한글을 배우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써보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쓴 글자에 조금이라도 자만하면, 바로 다음 글자에서는 어김없이 태가 났다. 글씨가 흔들리거나 힘을 너무 주거나 한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이미 틀리게 썼더라도, 끝까지 쓴다. 아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음자에 다시 정성을 쏟아본다. 조금 더 나아진다. 이미 지나온 길이 잘못 들어선 길이라 생각돼도, 오늘이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더라도 내일의 한 걸음에 다시 힘을 내면 된다. 다 쓰고 들여다본 화선지에는 비뚤거리는 글자들이 춤을 추었지만, 그 자체로 간직될 내 걸음이 될 거라고. 획을 그으며 생각한다. 언젠가, 풀마라톤을 뛰다가 이미 계획했던 기록도 틀어지고, 힘들어서 눕고만 싶었던 적이 있다. 늦더라도 끝까지 간 것 자체가 처음이니, 한 걸음씩만 내딛자고 생각했다. 그덕에 첫 풀마라톤의 완주메달을 받을 수 있었다.   


서예를 획의 예술이라고 한다. 단순히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이라기보다는 힘의 강약 조절에 따라 들숨과 날숨처럼 글에 생명력과 운동성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붓을 쥔 손에 힘을 주면 굵은 먹물이 화선지에 스며든다. 다시 흐름을 놓지 않고 붓을 가볍게 들어 선을 잇고, 힘을 주어 점을 찍고, 힘을 빼 날카롭게 끝을 마무리한다. 마음같이 되지 않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붓글씨가 마음을 다스리는데 좋은 이유는 그것이 다시 쓰는 게 허용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곳을 두 번 지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뿐더러, 고쳐 쓰는 것도 어렵다. 획이 삐뚤어도 이미 지난 곳은 그 자리가 뚜렷이 남아, 고쳐 쓴다 해도 그 모양이 도리어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 한 자 한자에 보다 집중하게 된다.      


작가 이슬아는 <심신단련>에서 말한다. 이런저런 역사를 품은 , 어리석고 지혜로운  몸을 믿으며 걷다 보면, 몸은 하루의 무수한 가능성들을 어떻게든 맞이하고 감당할 이라고 말이다. 비뚤거리는 글씨도 제 자리를 찾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다. 좌충우돌 갈팡질망 헤매곤 했던 지난길만 돌아보며 낙담하지 말고, 일희일비 하지않고 묵묵히 걸어가야지 다짐해본다. 봄날이 오기 전엔, 한자 쓰기를 연습하고, 입춘대길(立春大吉)을 부모님께 선물하고 싶다. 일상에 작은 획을 그은 하루가 이렇게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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