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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Jan 18. 2021

[5일] 아무튼, 계단

계단 걷기

왜 계단인가

코로나 19로 헬스장이 오랜 기간 문을 닫았다.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와 찬바람에 좋아하는 달리기도 한동안 하지 못했다. 뉴스를 보니 새로운 운동 라이프가 생겨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이 계단을 오른다. 심야에 주차장에서 걷는다. 일상생활에서 어떻게든 몸을 조금씩 움직이려는 몸부림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나듯 재택근무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출근을 하는 날이다. 이런 날, 운동을 겸하기로 한다. 오늘은 계단을 오르는 날이다.      


가장 먼저 달라진 건 출근복장이다. 운동화에 따뜻하고 편한 바지와 패딩점퍼로 무장한다. 핸드백 대신 백팩을 멘다. 가방의 무게는 욕심에 비례한다. 오랜만의 출근에 재택용 작업물을 챙겨 넣느라. 이동하면서 읽을 책도 챙기느라, 가방이 평소보다 무겁다. 산행이라 생각하기로 한다.


달라지는 건 또 있다. 계단을 오르자고 마음먹고 나니 행동 하나하나 더욱 의식하고 신경 쓰게 된다. 무의식 중에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지 않을까 하며. 그리고 시간을 조금 더 주체적으로 쓰게 된다. 미리 걸리는 시간을 생각해 집을 나선다.           


오늘 계단 오르기의 원칙

출퇴근길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구간은 모두 계단을 이용한다.

층수가 낮던 높던 계단으로 이동한다.

오르막이 아닌, 내리막은 원래대로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무릎은 아껴야 한다.


역에 내려 마주하는 첫 계단. 직장인들이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대부분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는다. 계단이 힘들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시간이 빠듯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도 계단을 바삐 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다. 평소 같으면 내가 몸담았을 풍경을 지켜보며, 부지런히 계단을 오른다.           


회사 건물을 올려다본다. 빌딩은 오늘따라 유난히 키가 커 보인다. 엘리베이터 앞에 다다랐다. 엘리베이터는 다녔던 회사들 중 가장 속도가 빠르다. 그래서 심지어 버튼을 눌러 놓고도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다가 놓치기도 한다. 타고 싶은 마음을 뒤로하고, 처음으로 회사 계단을 오른다. 10층까지 가는 길에 우편물을 들고, 백팩을 메고 계단을 오르니, 가벼운 가방이 잠시 그리워진다. 숨이 차오르는 데는 마스크도 한몫한다. 한 층을 오르는데 25~30 층계를 걸어야 한다. 회사 건물은 층고가 높다는 걸 몇 층 오르지 않아 깨닫게 됐다.

깊은숨을 내쉬고 호흡을 가다듬고 나서 사무실에 들어왔다. 오늘 몇 번의 계단을 오르게 될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 후로, 점심 도시락을 사러 한 번, 외출 한 번. 두 번의 회사 계단을 더 올랐다. 30층을 오른 셈이었다. 퇴근길엔 대부분 내리막이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 잠시 의식하지 않고 있었나 보다. 집 앞에서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지친 몸이 반사적으로 행동했나 싶어, 자세를 고치고 마지막 집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하루의 마지막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며, 오르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계단을 걷는 행위는 오르는 것보다 나아가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계단을 천천히 걷다 보면, 언젠가는 높은 곳에 올라가 있다. 결과로만 보면 엘리베이터처럼 수직이동을 한 셈이지만, 계단으로는 수직으로 올라가는 걸 잘 느낄 수는 없다. 평소보다는 숨이 차고 힘이 드는 건 사실이지만, 계단을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면, 제법 높은 곳에 올라있는 것이다.      


자주 가는 산에는 정상을 코 앞두고, 끝이 없을 것만 같은 계단이 버티고 있다. 모두들 그 계단 앞에서는 평등하다. 어린아이도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도 자신만의 속도로 천천히 한 걸음씩을 내딛는다. 그러다  힘들면 난간에 기대거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도 좋다.  


어쩔 수 없이 계단을 올랐던 날들을 생각해본다. 더운 여름, 무거운 짐을 들고 4층에 있는 자취방을 오르면서, 계단 없는 삶을 꿈꿨다. 이제와 계단을 다시 생각해본다. 계단 없는 삶이 어디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다가 멈추고, 다시 올라가고. 계단의 모양새도 꼭 그렇게 우리와 닮았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생각보다 높이 올라와 있는 나를 또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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