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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지 Jan 20. 2021

[7일]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

그림을 그려보다


직장인 원데이 그림 클래스

           

  몇 해전의 일이다. 퇴근 후, 집에서 가만히 있다 보니 한낮의 회사일들이 뭉게뭉게 떠오르곤 했다. 온갖 걱정과 스트레스를 집까지 가져가다 보니, 일에도 ‘오프’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일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딴짓을 해야 했다. 회사일과 상관없는 일,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다가 그림을 그리는 원데이 클래스의 문을 두드렸다. 내가 좋아하는 선인장을 두 시간 만에 그려서 집에 가져갈 수 있다는 말에 혹했다. 평일 저녁, 퇴근 후 미술을 배우기 위해 모인 직장인들 네댓 명이 어스름 조명 아래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일과 후에 에너지를 모아 다시 그림을 그리는 공간을 찾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왠지 나와 같은 걱정거리를 안고 있는 분들이라 짐작됐다.


  선생님의 그림을 따라 선인장을 그렸다. 아크릴 물감으로 덧칠을 하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그럴듯한 그림이 완성됐다. '그럴듯한'이라는 느낌은 전적으로 주관적이었는데, 선생님 작품과 내 작품은 ‘같은 그림 다른 느낌’이었음에도 작품을 가지고 집에 가는 길엔, 무언가 선물을 받아 들고 가는 기분이었다. 학창 시절 미술시간외에 처음으로 그린 그림이라 더욱 애틋했다. 무엇보다 그 두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일과 사랑에 지쳐 마음앓이를 하고 있던 시기였는데, 그림의 맛을 본 후 한 달 과정의 클래스를 재수강했다. 캔버스는 네 배로 커졌다. 일주일에 한 번씩 퇴근 후에 근심과 고민을 쏟아내고 오는 날이었다. 퇴근 후 마주한 캔버스에서 그렇게 위로를 받았다. 틀려도 괜찮아. 미숙한 손놀림에 아크릴 물감이 제멋대로 칠해져도 괜찮았다. 다시 물을 뿌리면 수채화처럼 번졌고, 여러번 수정을 할 수 있었다. 모난 마음들도 덩달아 부드러워지는 시간이었다.  

   

크레파스 그림


  최근 오일파스텔 그림을 보면서 부드러운 기분을 다시 느꼈다. 하늘에 노을빛이 번지는 느낌을 오일파스텔로 그리는 과정을 보면서 빠져들었다. 색색의 오일파스텔을 사고 싶었지만, 3천 원짜리 크레파스를 샀다. 한 번 해보고 괜찮다 싶으면 제대로 사보자는 생각이었다. 크레파스 위에 작게 오일파스텔이라고 쓰여있었던 것도 한 몫했다.  

  

  영이그림 유튜브에서 기초 그림을 찾아 따라 그려봤다. 내가 좋아하는 것부터 그려보자. 먹을 것 중에서도 아보카도를 골랐다. 특별한 지도 없이 손놀림을 보며 그림을 따라 그려본다. 연필로 선을 그리고, 흰색으로 배경을 칠하고, 연한 색부터 진한 색으로 차례대로 색을 넣어본다. 녹색의 아보카도엔 녹색만 쓰이지 않았다. 푸른색, 검은색, 갈색도 모두 아보카도를 그릴 때 덧칠하다 보면 그림이 더 생생해졌다. 크레파스는 오일파스텔이 아니라서 그러데이션은 잘 되지 않았고, 크레파스 똥이 계속 나와서 그림이 지저분해졌는데, 아무럼 어때. 생각한다. 마주한 일들에 때로는 악착같지 않아도 될 필요가 있다.      


  흰 스케치북을 펼쳤다. 이번엔 바나나를 그려본다. 9분짜리 영상에 3분 정도가 스케치 영상이다. 밑그림 작업이 생각보다 길었다. 얼른 색을 칠하고 싶었던 터라 기초 작업이 이렇게 길 줄 몰랐다. 결과물에 대한 조급함과 기대로 스케치의 단계가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건 힘든 일이다. 스케치가 부실할수록 그림도 부족해진다. 영상을 따라 천천히 바나나의 모양을 잡아나가다 보니 제법 바나나 같은 바나나가 되어 있었다.

     

서두르지 말아요


그림을 그리는 건 글을 쓰는 것과도 닮았다. 글을 쓰는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서두른다고 되지 않는 것이다. 서둘러본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풀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자 한 자 내려가지 않으면 글이 되지 않는다. 미술 수업에서 기초부터 배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사물을 관찰하는 법, 형태를 잡아보는 법, 명암을 넣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내가 원하는 것들을 원하는 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을 글로 담아내듯, 요즘 내 곁을 함께해주는 것들도 그려본다. 커피, 책, 빵.. 따라 그리지 않고 그리는 건 쉽지 않다. 지금 내가 있는 공간을 오래 보고, 자세히 보려 한다. 곧 사라질 순간들을 눈과 마음에 담아야지. 조급해말고, 서두르지 말고, 자주 걸음을 멈추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래서 내 마음을 오롯이 담아낸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간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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