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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변희정 Apr 08. 2017

할머니 할머니 우리 할머니

원주로 할머니 병문안을 가는 길에...


내가 나이를 먹고 있긴 한가보다. 가족들이 자꾸만 돌아가면서 아프다. 지금도 할머니 병문안을 가기 위해 기차를 타고 원주로 향하는 길이다.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거나 머문다. 마냥 늙지도 않고, 항상 철없는 애처럼 세상을 살 수 있을 줄만 알았던 나였다. 그런데 부모님과 할머니께서 자꾸만 아프다고 하시는 모습을 보니, 내가 마냥 애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차장 밖에 스치는 산과 들을 보니 옛 생각이 절로 난다. 횡성 산골짜기에서 태어난 나,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은 나와 놀아줄 시간이 없었다. 원주로 이사를 나오기 전인 7살 때까지 그 빈자리를 채워준 건 할머니였다. 우리집은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나의 유일한 친구는 드넓은 자연과 할머니뿐이었다. 산에서 들에서 마당에서, 논과 밭에서, 그 어느 곳에서도 항상 할머니와 함께 했다.

겨울이면 화롯불에 생선을 바짝 구워서는 밥숱가락 위에 생선살 한점을 올려주시곤 했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이후론 그 어디서도 그런 생선 맛을 맛볼 수가 없었다. 간식거리가 없던 시골이었기에 할머니는 나와 동생들을 위해서 엿과 강정 등을 만들어주셨고, 아궁이에 감자와 고구마를 넣어서 구워주시곤 했다.

여름이면 새참을 싸들고 논과 밭에서 일을 하는 아빠에게로 향했다. 사실 내가 술을 처음 배운 건 그때였다. 막걸리 한사발에 설탕을 넣어 젓가락으로 휘 저어서는 한 모금만 맛을 보라며 건내주시곤 했다. 달달한 막걸리 맛에 빠져 한 모금이 두 모금이 되고 두 모금이 세 모금이 되어 어느새 얼굴은 붉게 달아 올랐다. 몇 장 없는 어린시절의 사진이 그 상황을 말해준다. 그 속엔 붉어진 얼굴을 하고는 할머니 옆에서 배시시 웃고 있는 내가 있다.

간식거리를 챙겨서는 냇가로 멱을 감으러 가는 일도 잦았다. 신나게 한바탕 노느라 물에 젖은 생쥐꼴이 된 나와 동생을 건져서는 수건으로 몸을 뽀송뽀송하게 닦아준 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찬물에서 놀고 돌아온 뒤면 난 어김없이 배앓이를 하곤 했다. 그럼 할머니는 '할미 손은 약손'이라며, 밤새도록 배를 쓱쓱 어루만져주셨다. 어려서터 위장이 약해서 체하거나 배탈이 나기 일쑤였던 내게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은 소화제나 다름이 없었다.

항상 하지 말라는 온갖 장난을 하기 일쑤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아지같은 내게 할머니의 품은 언제나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나만의 안전지대였다. 난 그렇게 할머니 품에서 만큼은 세상 무서울게 없는 무법자가 되곤 했다. 그런 할머니가 노쇄하셔서 아프다고 하니, 왠지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 기찻 간에 있는 내내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할머니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말아야 할텐데 걱정이 앞선다. 제발 부디 빨리 쾌차를 하셨으면 좋겠다.


산골짜기에서 나고 자란 어린시절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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