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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 Jul 05. 2022

하루 기록 (2)

2022년  06월 08일의 기록

"넌 기억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머릿속에 있던 무언가를 까먹음으로 인해서 이득을 본다는 의미일까. 모든 생물은 생존에 더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하게끔 설계됐으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잊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알게 모르게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의외의 사실이지만, '잊다'라는 말에는 '일하거나 살아가는 데 장애가 되는 어려움이나 고통, 또는 좋지 아니한 지난 일을 전혀 마음속에 두거나 신경 쓰지 아니하다.'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니 마냥 나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과거를 잊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은 분명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한 개인이 쌓아온 역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어느 정도의 선에서는 꼭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잊히게 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언제라도 그런 일들을 복기할 수 있도록 사람은 기록하는 방법을 배웠다. 결국 우리가 오늘날에 쓰는 문자도 처음에는 누군가의 경험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발전해왔을 것이다.


나는 기록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기록하고 무언가를 모으고 남기는 것에 있어서는 어려서부터 늘 진심이었다. 때로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 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하나하나 담아두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이었다. 어렸을 때 썼던 일기장, 습관적으로 친구들과 찍던 사진들 모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내가 지치고 힘들 때 큰 위안이 된다. 지금 당장은 힘들더라도 좋았던 일들이 있었기에, 나중에도 분명 다 해결되어 다시 좋은 일들이 가득하게 될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의 불씨를 피워주곤 한다.


이토록 내 삶의 흔적을 남기고 모아두는 일에 이토록 열심인 이유가 사실 기록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기록하는 일에 신경 쓰기 시작한 이유 중에 하나는 남들과 조금은 다른 면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의 감정 스펙트럼을 기분이 안 좋을 때 0, 기분 좋을 때 100으로 한다면 내 감정의 범위는 40에서 60 사이, 많이 쳐줘도 30~70의 범위 안에 들어온다. 분명 나도 기분이 좋고 나쁨이 있지만, 남들에 비해서 그 두 상태의 차이가 썩 크지 않은 편이다.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렸을 때는 늘 감성적이고 예민한 아이였다고 한다. 툭하면 울고, 기분이 좋을 때는 한없이 밝은 그런 아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머리에 피가 마르기 시작한 뒤로는 그런 모습이 점차 없어지게 됐다. 그리고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무미건조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그러다 보니 큰 행복함을 느끼거나 축 늘어지도록 슬퍼질 때의 순간에 느낀 기분들을 어떻게든 남겨 놓는 것이 나 스스로에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감정적일 수도 있구나' 할 정도의 찰나를 기록해놓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내가 '사람으로서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중요한 일인 것이다.


무언가를 기록해 놓고, 간직하는 것을 열심히 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력도 좋아지게 된 것 같다. 안타깝게도 공부하는 것까지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나, 최소한 나한테 일어났던 일들과 그때의 기분은 굉장히 잘 기억하는 편이다. 사진같은 확실한 매개가 있으면 더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때 개인적으로 상대가 "어, 그래? 난 기억이 잘 안나."라고 이야기할 때가 가장 서운하다. 분명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같은 추억을 나누었는데 기억하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생각하면, 괜스레 '나만 좋았던 걸까' 하고 풀이 죽는 기분이다.


물론 누군가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원망하지는 않는다. 머릿속에 저장될 수 있는 정보의 양에는 한계가 있으니 내가 상대적으로 그 사람에게 덜 중요한 사람이었구나, 그 일은 그렇게 인상깊은 일이 아니었구나 하고 넘기면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했을 때는 이렇게 넘기게 되는 일이 더 서글픈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으니 남의 기준을 침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음에는 함께 했던 순간들을 더 잘 기억해낼 수 있도록 더 좋고 빛나는 기억들을 남기면 된다.




"아니, 기억이 잘 안 나"


기록하고 기억하는 것을 잘 한다고, 내가 잊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나도 사람인지라 기본적으로는 시간이 흐르거나 내 뇌가 덜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일은 알아차릴 틈도 없이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분명 기억하고 있지만 기억이 안 난다고 얼버무리는 순간들도 분명 있다.


그 순간들이 처음에 내가 생각하기보다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거나, 내가 품은 마음에 비해서 상대방은 그 정도로 마음을 쏟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그렇다. 어찌보면 나 혼자 크게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은 그 사람에게 짐이 되고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느낄 때는 '아, 그랬었나?', '아니, 기억이 잘 안 나'하고 넘기려고 하는 편이다.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기분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대충 울면서 억지로 웃음지어야 하는 기분이라고 하면 들어맞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다르듯, 같은 순간을 공유하더라도 서로에게 남는 추억의 형태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분명 '내가 좋았으면 너도 좋았을거야' 하는 생각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나 중심의 이기적인 사고였던 것 같다. 실상 남들이 즐거운 자리에서는 내가 불편할 수도 있는 것과 별반 다른 일이 아닌데 말이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들도 있었던 것 같다. 분명 행복한 한 때를 보내고 나서 나중에 되돌아보니, 나만 행복했던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단단해지고, 참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된 뒤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기로 했다.


'기억하다'라는 말의 뜻에는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내다" 라는 의미가 있다. 달리 말하면 무언가를 기억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의미다. 같은 순간을 공유하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을 간직하는 것, 혹은 소중한 곳에 담아두고 다시 생각 해낼줄 아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가 기억하지 못해도, 너가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최소한 그 순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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