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의 밀당)
8월 23일 수 비리 도착 23km
어제 피레네를 넘을 때 힘들어하는 나 때문이었는지 웬일로 남편은 걸어서 완주하려던 계획을 바꾸자고, 버스 타고 다음 숙박할 곳으로 가자고 나를 채근했다. 두 번째 오는 것이니 너무 고생스럽게 걷지 말자고 한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의 호기찬 각오가 어제 하루 센 바람을 맞으며 꺾인 걸까? 아니면 나 때문에? 그러다가 한국에 돌아가서 나 때문에 두 번째 순례길을 완주하지 못했다고 생각날 때마다 말하면 어쩌지? 여러 생각들이 급하게 머릿속을 왔다 갔다 한다.
사실 2년 전에 처음 순례길을 걸을 때는 우연히 책 한 권 읽어보고 가보자고 결정한 후 남편 혼자 일정을 짜고 나는 전혀 순례길 걸을 준비를 못한 채 왔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있던 작은 아들을 40여 일 혼자 집에 두고 오기가 걱정되어, 아무것도 준비 안 하고 있던 아들의 비행기 티켓을 급하게 예약하고, 방수되는 등산화만 사신고 같이 왔었기 때문에 책에서 위험한 구간이라고 설명한 곳은 가끔 차를 타고 건너뛰었다.
물론 4월이라 비도 수시로 내려서 더 그랬다. 그래서 800km 구간에서 600km만 걸었었다. 버스를 타기도 하고, 택시를 타기도 하고, 사하군에서는 기차로 레온까지 가기도 했었다. 그래서 오히려 순례길이 아름다웠고 다시 한번 걷고 싶어 졌는지도 모른다.
그때보다 체력이 더 떨어지긴 했지만 한번 왔었던 곳이라 두려움도 호기심도 사실 없었는데 어제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고전한 게 남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 듯하다. 여기서 누군가는 확실한 결심을 해야 한다. 천천히 완주할 것이냐 아니면 쉽고, 안전하며 예쁜 곳만 걷고 일찍 포르투갈로 여행을 갈 것이냐 하는.
우리가 다시 여기를 온 이유를 생각했다. 정신없이 걷고 건너뛰었던 길을 다시 천천히 음미하며, 전에 머물지 못했던 작은 마을에서 머물면서 그들의 삶의 모습도 보면서 그렇게 여유 있게 걷자고, 완주하고 그때 가지 않았던 피니스테레 까지 가보자고, 그리고 묵시아도 가보자고 했던 계획들을 어제 하루로 쉽게 바꾸고 싶지 않았다.
내가 걸을 때 힘들다고 징징될까 봐 남편이 먼저 선수를 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당신 때문에 완주 못하고 왔다는 소리만큼은 듣고 싶지 않다고 결심했다. 다시 못 온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걸어보자고.
남편에게 일단 린 소아인까지 가 보고 힘들면 차를 타자고 말하고 내 가방에 있던 세면용품과 물병을 남편 가방에 넣었다. 한결 가벼워진 가방을 메고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기도를 하고 출발했다. 어제저녁 약까지 먹고 잠을 잔 탓에 한결 몸이 가벼워 걸음이 빨라진다.
어제는 계속 오르막 길이었다면 오늘은 계속 내리막 길이고 목초지를 지나가며 오솔길을 걷게 되어 더욱 상쾌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만난 안나 씨는 배낭도 작은 걸 메어서 그런지 무척 빠르게 걷고 있었다.
처음 까미노를 걷게 되어 흥분되고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져 초반에 다칠 수도 있기 때문에 나는 안나 씨에게 앞으로 조금 더 가면 경사가 심한 내리막 자갈길을 만날 텐데 조심하라고 얘기해 주었다. 우리는 2년 전 이 길을 한번 걸었기 때문에 걸으면서 힘들었던 길을 기억했고 미리 조심했다.
소나무와 떡갈나무 등으로 울창한 숲길의 오르막을 올라 드디어 45도로 경사진 흙과 자갈 등이 뒤섞인 내리막길을 4km 정도 내려오니 수 비리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가 보인다.
이번에는 좀 더 깨끗한 사립 알베르게에서 자려고 했는데, 이미 일찍 도착한 순례자들로 마감이 되어 할 수 없이 다시 그때 머물렀던 공립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샤워하고, 시장 봐서 5명이 고기, 양상추(비슷한), 고추장에 캔 김치, 캔 깻잎, 올리브 등 풀어놓고 밥을 먹으니 꿀 맛이다.
여기에 맥주와 스페인의 맛있고 저렴한 와인까지 곁들였으니 일류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았다. 역시 안나 씨 부부와 걸으면서 만난 ROTC 장교로 군생활을 마치고 온 젊은이도 함께였다. 늦게 도착한 한국인 젊은 부부에게도 밥을 남겨 함께 음식을 나누니 더욱 즐거운 식사 시간이었다.
안나 씨네는 배낭에 밑반찬 캔을 많이 준비해 와서 덕분에 우리도 잘 먹었다. 배낭이 많이 무거울 텐데 아직 50대이고 역시 ROTC 장교로 제대했다는 안나 씨 남편은 걷느라 힘들었을 부인의 발 까지도 저녁이면 마사지를 해 주었다.
보기 좋은 모습이다. 연약해 보이는 안나 씨가 지치지 않고 걷는 비결이었다. 이번 순례길에는 부부가 함께 온 분들을 자주 만나게 되어 더욱 보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