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아름답다)
8월 25일 시스루 메노 르(Cizur Menor) 9km
새벽이 되어도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다. 우리와 함께 묵었던 분들도 천천히 산티아고 길을 걷는 분들인가 보다. 시간의 제약이 없거나 아니면 산티아고데 콤포스텔레까지 가지 않고 자신들이 정해놓은 구간까지만 걷고 또 다음 기회에 나머지를 걷든가 아니면 이걸로 좋은 경험으로 끝내거나 하나보다.
순례를 떠나기 전 우리는 한번 가면 무조건 다 걸어서 완주하고 돌아와야 하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와서 보니 유럽인들은 휴가 때 조금씩 구간을 나누어 걸어서 완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처음 왔을 때 알베르게에서 만나는 한국인들은 어디에서 출발했느냐 하루 얼마씩 걷느냐 하면서 시시콜콜 묻는 걸 좋아했다. 우리는 가끔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서 일정을 앞서 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우리가 솔직하게 그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걸어서 순례를 해야지 차를 타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대놓고 비아냥 거리는 분들도 있었다.
그 뒤로는 우리는 한국인들을 만나면 차를 탔다거나 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조금 거리를 두면서 말했었다. 처음 간 길에서 각자 나름대로 사정이 있고 체력이 있기에 이해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하는데 무슨 시합을 하는 것처럼 오늘은 얼마를 걸어왔다 하는 걸로 으스대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늘 하던 대로 6시쯤 일어나 준비하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Pamplona로 상쾌하게 걸어 들어갔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어제 그곳에서 묵고 이미 다음 구간으로 떠났을 시각에 우리는 마을의 이모저모 모습을 구경하면서 그곳으로 가고 있다.
막달레나 다리를 건너 2년 전에 왔을 때 묵었던 성곽 앞의 알베르게 앞에 앉아 다시 온 기념으로 사진도 찍고 복숭아도 하나씩 먹으면서 추억을 되새김했다.
두 번째의 까미노는 처음 정신없이 걸었던 까미노 길을 다시 복기(바둑용어)하는 듯하다. 까맣게 잊은 것 같아도 아! 여기서 어떡했었지? 하면서 추억의 장소에 오니 2년 전의 일들이 어제처럼 되살아나서 신기했다.
그때는 까미노를 하루 최소한 20km 이상을 걸었고 많이 걸었을 때는 30km도 걸었다. 4월이라 초록의 보리밭 물결과 노란 유채꽃밭이 가득했던 너른 들판을 환호성을 지르며 힘들지만 힘들지 않게 걸었던 것 같다.
성곽 앞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니 팜 플로나(Pamplona) 시내로 이어진다. 산타마리아 성모 성당에서 성무일도 하고 미사가 계속 이어져 영성체도 하고 수 비리(Zubiri)에서 만났던 한국 교우들도 만났다.
그분들은 하루를 더 머물고 있어서 천천히 오는 우리를 만날 수 있었다. 교우 중 한 분이 라바날에 가면 베네딕토 수도원이 있는데 거기에 한국인 신부님이 계시다는 얘기를 했다.
그분은 이번에 3번째 왔는데 첫 번째는 다른 사람들 따라서 멋모르고 왔다가 신앙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한국에 돌아가서 교리를 받고 영세를 하고, 다시 두 번째의 순례를 했는데 그때는 완주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또 오고 싶어서 왔는데, 이번에는 걷는 게 힘들고 뭔가 신이 나지 않고 자꾸 기운이 처져서, 마드리드로 갔다가 일찍 귀국할 거라고 한다.
교우들과 헤어져 우리는 헤밍웨이 카페에서 차를 마시러 찾아갔지만 아직 문을 열지 않았다. 대체로 큰 도시는 저녁이 되어 늦은 시간까지 순례자들과 관광객들로 붐비는데 아침에는 대부분 문을 닫아 조금 썰렁한 편이다.
헤밍웨이 카페도 저녁 시간이었으면 들어가 볼 수 있었겠지만 2년 전 왔을 때 Pamplona에서 묵으며 여기저기 기웃기웃해서인지 특별히 더 둘러보고 싶은 곳이 없어 다행히 문을 연 노천카페에 가서 차와 간단한 음식을 먹고 까미노를 출발했다.
시내를 벗어나면서 초록 잔디가 넓게 펼쳐진 나바라 대학 교정을 지나가게 되었다. 우리는 교정 한편 풀밭에 누워 망중한을 즐기다가 뜨거운 햇빛을 받으며 까미노를 걷게 되었다. 4월, 5월의 날씨보다 역시 8월은 아직 덥고 뜨겁다. 반팔 입은 팔뚝이 타는 듯 아프고 따갑다.
그래서 오늘은 Cizuru Menor 마을에서 묵기로 했다. 동네가 깔끔하고 조용하다. 오후 1시가 넘어 햇빛 속을 걷는다는 게 너무 힘들어 앞으로는 1시쯤 도착되는 데서 자기로 했다.
마당이 있는 큼직한 알베르게에서 샤워를 했는데도 더위를 먹은 건지 기운이 안 나서 배고파도 누워서 쉬다가, 슈퍼에 가서 과일하고 감자 1개, 당근 1개, 양파 1개, 돼지고기 약간 사 가지고 와서 집에서 가져간 카레가루 넣어서 카레라이스를 해 먹었다.
맛있게 잘 되어 한국인이 있었으면 함께 나누고 싶은데 오늘 한국인은 우리뿐이고 다른 외국인들은 각자의 음식을 해 먹어서 내일 아침 먹어야 할 거 같아 냉장고에 잘 담아 두고 동네 구경을 나갔다.
비교적 깔끔한 주택들이 창가에는 예쁜 꽃이 핀 화분들을 올려놓아 보기 좋았다. 7시에 미사가 있다고 해서 성당에 올라갔더니 우리 방에 함께 묵는 브라질 부부(나이는 우리랑 비슷해 보였다)가 벌써 와서 조용히 묵상하고 있었다. 파란색 티셔츠도 같은 걸로 맞추어 입고 은발 머리를 파마한 부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천천히 걷다 보니 부부끼리 온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다. 특히 우리처럼 은퇴하고(연령상) 온 듯하다. 작은 마을의 저녁 평일 미사에 순례 객들이 꽤 많이 참석했다. 신부님은 에스파니 어로 미사를 하셔서 우리는 강론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순례객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강복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