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가 기억하는 샐러드 맛)
8월 26일 푸엔테라 레이나 20km
Puente la Reina (여왕의 다리)라는 뜻을 지닌, 까미노에서는 가장 아름답고 상징적인 다리가 있는 마을을 향해 아침 일찍 출발했다.
용서의 언덕이라 불리는 페르돈 언덕을 이번에는 힘들지 않게 올랐다. 이 언덕을 왜 용서의 언덕이라고 특별히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여기까지 오는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언덕을 오르는 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던 여러 응어리들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경험들을 통해, 이 언덕을 오르고 지나온 산과 들을 돌아보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어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초록의 밀밭은 이미 추수가 끝나 누런 밑동만 드넓게 보이고 노란 유채꽃물결이었던 그 옆의 너른 밭도 다른 작물을 심기 위해 갈아엎어져 있었다. 봄과 늦여름의 풍경이 너무 다르다.
사실 우리가 이 시기를 택해서 온 것은 부르고 스 알베르게 식당에 걸려있던 황금색 넓은 밀밭의 풍경을 사진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감상하고 싶어서 인데 이미 추수가 끝나고 밭들은 갈아놓은 곳도 있고 아직 밑동만 남은 채 햇살에 빛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왠지 황량한, 색이 없는 들판을 걷는 것 같은 허전함을 느낀다. 힘든 오르막길로 가는 길에 양쪽으로 나뉘어 초록의 물결과 노란색의 물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얼마나 예뻤던지 연신 사진을 찍으며 감탄했던 그때가 그리워진다.
2년 전 바람을 맞으며 힘들게 올라간 페르돈 언덕에서 '나바라 까미노 친구들 연합'에서 설치했다는, 순례자들이 걷는 모습을 형상화해 놓은 철로 된 조형물 앞에서, 그것과 똑같은 포즈를 하고 사진을 찍는 유럽 순례자들과 함께 어울려, 사진을 찍고 찍어주고 하면서 부엔 까미노를 외쳤던 기억이 새롭다.
며칠 전 넘어온 피레네 산맥의 봉우리들이 보이고 Arga강 계곡도 보인다. 같은 길을 다시 걷게 되니 추억을 떠 올리고 지나간 시간의 모습을 상기하는 것은 있어도 새롭게 흥분되고 설레는 마음은 적은 거 같다.
남편은 지금도 신나게 앞서 가는데 나는 '아! 저기를 오르고 나면 경사진 자갈길이 계속되는데 조심해야 되는 곳이지' 하는 생각부터 드는지.
이미 알고 있는 길이라 그럴까. 인생을 사는 것도 우리가 앞을 모르니 조금은 두렵고 기대하고 설레는 걸까. 우리의 삶도 안다고 생각하고 뻔하다고 생각하면 권태를 느끼고, 게을러지겠지.
인간에게 미지의 세계는 언제나 흥분되고 두렵고 떨린다. 그래서 신께서 우리에게 미래를 알 수 없게 하셨나 보다. 우리의 열정적인 삶을 위해.
지난번 묵었던 오바노스 마을을 지나며 미리 생일 축하하자고 마을 Bar에서 저녁을 사주셨던 시누님을 생각했다. 함께 오기로 계획했다가, 남편이 이번에는 둘이서 다녀오겠다고 해서 굉장히 서운해하셨던걸 생각하니 죄송하다.
걸으며 부부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건지 두 달이란 긴 여행이라 남편이 생각이 많았던 거 같다.
가뿐하게 20km를 걸어와 마을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로 들어가 침대 배정받고, 식재료 사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다 보니, 마당이 넓은 공립 알베르게가 보이고 순례자들이 야외의자에 앉아 쉬는 걸 보게 되었다.
조금 전 우리가 오늘 들어간 알베르게는 마을 초입에 있어 근처에 편의시설이 없고 밖에서 쉴 곳이 없는데라 알베르게를 마을 안쪽으로 옮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 알베르게 호스피탈 레에게 일행이 마을 안쪽 알베르게에 있어 혹시 그쪽으로 우리가 옮겨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유쾌한 호스피탈 레는 괜찮다고 옮겨도 된다고 허락을 해줬다. 우리는 고마워하며 마을 안쪽의 겉은 조금 허름해 보이지만 마당이 넓은 공립 알베르게로 옮겼다.
5유로씩 내고 도장 찍고 침대 배정받고. 매일처럼 반복되는 일상이다. 샤워하고 빨래해서 햇볕 좋은 마당의 빨랫줄에 집게 꽂아 가지런히 널고, 배낭에서 미트볼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워 대충 허기를 잠재우고 정원에 앉아 쉬고 있는 데, 늦게 도착한 한국인 부부들과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Zubiri에서 만났던 강화성당 부부도 보였다.
손 흔들어 인사하고 슈퍼에 가서 내일 걸을 때 먹을 과일과 물을 사고 손님으로 북적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저녁으로 순례자 메뉴를 시켰다(12유로). 샐러드가 특별히 참 맛있었는데 소스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코스로 나온 파스타도, 돼지고기도, 닭고기, 와인까지 코스로 나오는 순례자 메뉴는 지친 순례자들에게 맛있는 포만감을 주고 영양까지 챙겨주는 것 같다.
한국에서 이 가격에 이런 음식을 먹기는 어려울 것이다. 스페인 정부에서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자들을 위해 그 길목을 지나는 마을을 지원하고, 그 마을에 사는 분들도 순례자들에게 호의적이고 늘 '부엔 까미노!'를 외쳐 주든지 아니면 '영광이 있기를!' 하는 축복의 말을 건넨다.
저녁도 푸짐하게 잘 먹었으니 이제는 동네를 둘러보는데 마을 이름이 된 아름다운 Puente la Reina 다리 밑에서 음악회(재즈 공연)가 있는지 사람들이 삼삼오오 둘러 모여 앉아, 샌드위치며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권해서 감사히 와인 한 컵을 받아 들고 자리를 골라 앉았다.
한국인 젊은 부부가 우리에게 눈짓으로 아는 척을 한다. 그들은 오늘의 음악회를 참석하기 위해 순례자 복장이 아닌 어깨가 파인 파티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유럽인들 중에도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샤워하고 살랑살랑 예쁜 원피스를 입고 저녁식사에 나오는 경우는 많이 보았는데 한국인들이 의상을 갖춰 입은 것은 처음 보는 듯하다.
가사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재즈의 리듬만으로, 음악회에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과의 분위기로 우리는 오랜만에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손을 흔들며 그들과 호흡을 맞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알베르게로 돌아오며 보니 동네 여기저기서 마을 사람들이 공연을 하며 즐겁게 놀고 있다.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주말 시간은 외지에서 직장을 다니던 자녀들까지 돌아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흥겹고 즐겁다. 스페인의 전형적인 농촌 풍경인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