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딜리버리)
8월 29일 또레스 데 리오(Torres de Rio) 20km
6시 50분에 몬 하르딘을 출발했다. 날씨도 선선하고 길도 평탄해서 단숨에(도중에 비가 와서 우비 입고) 로스 아르 꼬스까지 12.8km를 걸어왔다. 중간에 쉬지도 않고. 우리가 걷는 길 뒤로 안개가 피어올라 신비스러운 분위기 아래 태양이 떠오르면서 추수가 끝난 밀밭은 누렇게 황금색으로 반짝인다.
밀밭이 넓게 펼쳐져있고 중간에 갈아엎거나 다른 작물을 심었던 붉은색 밭과, 포도가 실하게 익어 달린 가지런한 포도밭이 황금색/적색/녹색의 아름다운 색조를 보여주며 걷는 길을 지루하지 않게 한다.
오늘 아침은 다행히 달팽이 행렬이 적어서 밟고 지나지 않아서 좋았다. 달팽이를 피하다가 잘못하면 넘어질 수도 있어서 신경이 쓰였는데 웬일인지 오늘은 많이 보이지 않아 편하게 걸었다.
젖가슴 같이 오목오목한, 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은 작은 동산 들과 밀밭의 조화를 보면서 즐겁게, 힘들지 않게 20km를 걸어 로스 아르코스, sansol, Torres de Rio에 도착했다.
언덕 기슭에 자리 잡은 또레스 데 리오 마을의 호텔 San Andre 알베르게는 풀장도 있고 레스토랑도 갖춘 호텔을 겸한 상급의 알베르게였다. 순례자들 중에도 수영복 입고 풀장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남편도 신이 나서 풀장에 들어가 수영을 했지만 풀장이 크지 않아서 오래 하기는 어려웠다. 침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늦게까지 자전거로 도착한 사람들로 알베르게는 꽉 찼다.
저녁식사는 7시에 시작하여 거의 9시까지 계속되는데 테이블에 오는 대로 앉아 first corse, second corse를 선택하고 각자의 호기심을 채우느라 시끌벅적 얘기하기에 바쁘다. 에스 파니 어, 영어, 독일어, 가끔 한국어로.
브라질에서 온 남자가 태권도 4단이라고 하면서 한국말 아는 단어를 여럿 얘기했다. 브라질에서 태권도가 많이 알려진 모양이다. 한국인은 우리 말고 혼자 온 남자들 두세 명을 만났다.
혼자서 왔는데 오기 전에 등산도 많이 가고 제주도 올레길을 비롯해 지리산 둘레길까지 걷고 왔다고 하신 분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고 하면서 하루에 30km도 걸은 적이 있다고 자랑했다. 배낭은 택시로 도착할 마을의 알베르게로 미리 보내고 가벼운 가방에 물과 간식을 넣어서 걷는다고 했다.
유럽인들은 대부분 무겁든 가볍게든 자신의 배낭을 메고 심지어 냄비까지 들고서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비해 가벼운 차림으로 걷는 사람들 중에 한국인들이 많다.
물론 서울에서 산티아고로 출발할 때 준비 없이 많은 짐을 가져와 할 수없이 배낭을 택시에 태워 미리 보내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택시로 배낭을 미리 배달해 주는 동키시스템을 알고 한번 보냈다 가 습관처럼 계속 자신의 배낭을 메지 않고 걷는 한국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한번 배달시키는데 드는 비용이 하루 알베르게 값일 텐데 말이다. 처음 산티아고에 와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어깨가 아파서 힘들 때 우리도 유혹을 느끼긴 했었다. "두 개 중 한 개에 짐을 많이 넣어 미리 배달시키고 우리는 가벼운 배낭을 돌아가면서 메고 걸으면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너무도 계산된 마음이.
그러나 우리가 그 유혹을 이겨낸 것은 나이 든 유럽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신의 배낭을 즐거이 메고 걷는 모습을 보며 부끄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내 인생의 무게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메고 걷자. 힘들면 힘든 데로 쉬면서 걸어보자 하는 것이 우리들 생각이었다. 배낭에는 샤워하고 갈아입을 속옷과 겉옷이 딱 한벌밖에 없고 침낭이며 우비며 꼭 필요한 의약품과 물 그리고 마을이 없을 수도 있으니 최소한의 간식이 있을 뿐인데 그래도 배낭은 8kg 이상은 되었다.
그러나 배달이 좋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함께 엮어서 보내는 배낭 중에 버그(물리면 온몸이 가렵고 몹시 고통스럽다)가 있으면 옮기 때문에 더더욱 삼가야 한다.
남자들이든 여자들이든 모여 앉아 통성명을 하고 나면 끝없이 화제를 바꾸어가며 수다를 떤다. 걷는 동안에도 이야기를 계속하며 가는 사람들도 있다. 식사하며 두 시간가량 이어지는 얘기를 대충대충 들으며 공감되는 얘기에 적당히 머리를 끄덕여 주면서 길게 이어진 저녁식사를 마치고 휴식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