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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시간을 넘는 삶의 신비

(조개와 십자가와 종)

by 구슬 옥

9월 1일 나헤라( Najera) 16km

동트기 전에 길을 나섰다. 짧은 내리막길을 걸어 이어지는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가파르지 않아 오르막을 오른다는 힘겨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길게 이어진 포도나무 밭을 지나면서 진하게 포도향을 풍기며 잘 익은 포도는 언제 수확하려고 저렇게 놓아두나 하는 나만의 걱정을 하면서 걷는다.


키가 높지도 않은 포도나무에 작은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실하게 달려있다. 내가 일반적으로 먹던 포도가 아닌, 와인을 만드는 포도라 그런지 알이 작고 까맣다. 지난번에 한번 맛을 보았는데 참으로 달고 맛있었다. 씨도 없이. 돌투성이의 척박해 보이는 땅에서 그렇게 맛있는 포도가 생산되다니...

까미노 길을 동행해 준 포도밭-작은 포도송이의 향이 순례자들을 자극한다.

해발 100미터 높이로 올라가는 가파른 san Anton 언덕을 올라 다시 내리막이 시작되고 나헤라까지 완만하게 내리막이 이어져 힘들지 않게 걸었다.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에 보았던 거친 돌과 들풀 사이에 까미노 표시 팻말이 보이고, 주위에 여기를 지나간 순례자들이 하나 둘 올려놓고 간 돌무더기가 보인다.


앞으로 산티아고 데 꼼뽀스뗄라까지 592km 남았다고 적혀있다. 까미노를 걷기 시작한 지 10여 일이 지나는 동안 그래도 많이 걸어왔다. 여러 사람들을 그 길에서 만났고, 환호했고, 헤어졌다. 그리고 까미노를 걷는 우리만의 지향도 갖게 되었다. 표지판에 쓰인 숫자를 보며 감사한 마음이 밀려온다. 남은 까미노도 잘 걷기를..

산티아고 꼼뽀스뗄라까지 남은 거리를 알려준다

아침을 간단하게 커피와 빵을 먹고 출발했고, 걸어오면서 간식도 별로 먹지 않아서 그런지 배가 고프던 차에 중국집을 발견했다. 나헤라의 초입에 있는 집이었는데 남편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나에게 눈짓으로 들어가자는 사인을 보내며 먼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서울에서 먹었던 닭고기를 튀겨서 야채와 함께 소스를 넣은 '유린기'는 없어서 마파두부 볶음밥, 오향장육(?) 같은 비슷할 거라 생각되는 요리를 그림을 보면서 시키고 고량주 1잔과 맥주 1잔을 함께 시켜서 먹었다. 마파두부 볶은밥은 양이 엄청나서 남편하고 나눠 먹고, 거기에 다른 메뉴도 먹으니 배도 불러 행복한 마음으로 도시 안으로 걸어갔다.

작은 철물들을 취급하는 가게도 있고, 액세서리 등을 파는 가게들을 구경하며 지나오니 다리가 있고 거기서 바라보니 거대한 붉은 바위산 밑에 건물들이 보인다.


그제야 2년 전 비를 피해 버스를 타고 내려서 거대한 바위산을 보고 놀랬던 기억이 나고, 발에 잡힌 물집 때문에 걷기 힘들어하는 작은아들과 남편을 위해 들렸던 약국도 바로 다리를 건너니 그곳도 그대로 있었다. 처음 왔을 때는 어리둥절하고 찾아보기 바뻤었는데 두 번째 왔다고 도시가 낯설지 않고 익숙하다. 그것도 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왔는데 이곳은 전혀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다리에서 가까운 곳에 3층짜리 알베르게가 있었다. 사설 알베르게였다. 일단 먼저 공립 알베르게를 가 보기로 하고 찾아갔더니 유럽 할아버지들이 길게 줄을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유로 정도만 내도 되는 기부제 알베르게라 자주 산티아고 길을 걷는 유럽의 할아버지들이 적당히 걷고 와 자리를 잡는듯했다.


우리 부부는 일찌감치 그곳을 포기하고 사립 알베르게를 찾다가 처음에 보았던 다리 가까이 있는 3층짜리 예쁜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10유로 정도씩 내야 하는 곳이지만 깔끔하고, 집 앞으로는 작은 강물이 흐르고 잔디밭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1층 침대를 운 좋게 배정받고 씻고, 빨래하고 여유 있게 포도 한 송이 씻어서 강물이 보이는 잔디밭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허밍으로 노래하며, 몸도 살살 흔들면서 행복하고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즐겼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것은 이렇게 자신의 역량만큼만 걷고,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할 것도 없이 아침에 출발해 부지런히 5~6시간 걸어서 오후 1시 정도 안에 도착한 마을에서 쉴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인 거 같다. 걷는 동안 비용도 많이 들지 않아서 더욱 좋다. 그래서 스페인의 이웃한 나라들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몇 번을 걷는 것 같다.


점심을 너무 푸짐하게 먹은 탓에 저녁은 건너뛰고 동네 구경을 나와, 건너왔던 다리를 걸어 지난번 버스에서 내렸던 곳 근처를 걸었다. 그곳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현대적인 건물들로 도시가 이루어진 신 시가지고 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가 머무는 곳은 중세에서부터 이어져온 구 시가지로 까미노 길 위에 있어 관광객과 순례자들로 붐비는 곳이다.


다시 구 시가지로 돌아와 붉은 산 밑의 오래된 집과 새로 보수된 집들 사이로 있는 산타 끄루스 성당에 들어갔다. 제대 앞의 원통형 돔을 통해 빛이 들어와 불을 켜지 않아도 고즈넉이 가라앉아 있는 오래된 성당 안의 무게를 느껴볼 수 있었다.

산타 끄루스 성당 제대 앞의 빛

저녁 미사가 시작되고 스페인 신부님의 에스파냐어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전 세계 공통의 전례 순서라 불편 없이 참례할 수 있었다.


신부님이 미사 중에 제대 옆 기둥에 있는 조개와 십자가와 종을 만지고 치시며 강론을 마무리하셨다.


나도 미사가 끝난 후 조개를 만져보고 십자가를 만지고 종을 쳐 보았다. 신부님께서 오늘 미사에 참석한 순례자들을 위해 아마도 순례의 의미를 되짚어 주신 게 아닌가 생각된다.


미사를 마치고 성당을 나와 걷다가 수도원 옆을 지나게 되었다. 천년에서 최소 몇 백 년을 견디며 보수된 벽을 만져보면서, 그 오래된 시간과 연속되어 이어진 현재의 나의 모습에 시간을 넘는 삶의 신비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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