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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까미노에서 유혹에 빠지다

(never! 1박만)

by 구슬 옥

9월 6일 따르다 호스(Tardajos) 9km


부르고스 알베르게에서 1박을 더 할 수 있다는 달콤한 말에 짐 맡겨놓고 시내 구경을 하다가 은행의 ATM기에서 레온 대 도시에 들어갈 때까지 쓸 현금도 인출했다. 작은 마을에서는 카드 결제가 어려워 단위가 작은 현금이 항상 필요했다.


우리는 지난번 왔을 때 표를 사서 부르고스 대성당이랑 박물관을 둘러보았기에 이번에는 강 옆의 잘 가꾸어놓은 공원길을 산책했다.

부르고스 시내 강 근처의 paseo del Espolnon 공원

소음 속에서 아스팔트 길을 걸을 때는 더 이상 못 걸을 것 같이 힘들었는데 하룻밤을 자고 나니 어디서 생긴 힘인지 활기가 넘쳐 계속 시가지 주변을 구경하며 다녔다. 그러다 루르드에서 떨어뜨려 망가진 핸드폰 액정을 혹시나 수리할 곳이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 시내 여기저기를 훑고 다녔지만 찾지 못하고 다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맡겨놓았던 짐을 받아서 이미 알베르게 앞에 일렬로 줄 세워져 있는 가방 줄 뒤에 1층의 좋은 침대를 배정받으려고 서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낯이 뜨겁고 부끄러운 얌체 짓이었다.

알베르게 앞에 1박을 더 하려고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남편이 찍어놓았다--나의 참회 샷

새벽부터 일찍 나선 사람들은 29.5km를 12시 정도에 통과했거나 아니면 부르고스로 오는 중의 중간마을에서 어제 1박을 하고 걷기 시작해 일찍 도착했을 수도 있다. 접수가 시작되어 알베르게 호스피탈 레에게 순례자 여권을 건네니 어제 숙박했기 때문에 또 잘 수 없다고 가라고 한다. Never! 일행 중 아픈 사람이 있다고 했더니 9km 가면 알베르게 여럿이 있고, 호텔도 있다고 알려준다.


산티아고 길이 만원인 가을에는 2박이란 어떤 이유에서도 불가능했다. 잘못 알은 정보로 한낮을 걸어야 되는 처지가 되었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이라도 빨리 비켜나야 해서 머쓱한 얼굴로 돌아 나왔다.


할 수 없이 다시 걷기 위해 알베르게 앞 카페에서 점심으로 믹스 샐러드, 파스타, 로스트 치킨, 세르베사 1병을 시켜 먹었다. 음? 맛있다! 그동안 걸으면서 사 먹던 음식 중에서 최고였다. 이런 맛집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갑자기 어제저녁에 맛없는 해물 빠에야를 먹은 게 억울해졌다.


그래도 맛있는 점심이 위로가 되고 재충전되어 마찬가지로 퇴짜 맞은 강화성당 부부와(사실 그의 부인이 다리를 접 질러 절룩거리며 잘 걷지를 못해서 하루 더 묵으면서 쉬다가 다음 코스로 간다고, 하루 더 묵을 수 있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는 그의 말에 동조한 결과다) 동무삼아 9km를 걸어 따르다 호스에 도착해 6시쯤 알베르게에 들었다. 호스텔 알베르게인데 깔끔하고 12유로다.


부르고스를 떠나기 전 호스텔에 들어가려고 알아보니 하루 자는데 1인당 35~50유로였다. 스페인의 대도시 중 하나이니 관광객도 많아 물가도 싸지 않았다. 그만큼을 지불하고 그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어, 뜨거운 햇살을 피해 나무 그늘을 찾으며 도시를 빠져나오고 아스팔트 길과 공원길을 걸어 인근의 마을에 왔는데, 인구가 많지 않은 시골인데도 작지만 깨끗한 호스텔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강화성당 부부는 부엌 사용이 안 되는 곳이라고 공립 알베르게를 찾아 떠났다. 발목이 아픈 부인을 위해 하루 정도는 호스텔 알베르게에 묵을 만도 한데 늦은 시간에 고집스럽게 더 걸어가는 걸 말릴 수가 없었다.


우리는 씻고 빨래해서 옷을 건조하고, 순례자라고 저녁값도 할인해 줘서 10유로에 맛있게 먹고 동네를 잠깐 둘러보러 나갔다. 그러나 근처엔 주택도 별로 없고 보이는 것은 넓은 들판과 멀리 드문드문 불 켜진 집들이 있을 뿐이었다. 날씨도 흐린 데다 바람이 불어 춥고 스산해져 방으로 돌아와 쉬었다. 4인실에 이 층 침대가 둘이라 우리끼리 있으니 잘되었다 좋아했는데 꽤 늦은 시간에 외국인 순례자 한 사람이 더 들어왔다.

차 한잔을 마시며 오늘 까미노에서 했던 일을 돌아보았다. 부르고스는 지난번에도 일찍 도착해서 충분히 많이 보았는데 왜 우리는 하루를 더 머물 수도 있다는 말에 쉽게 끌렸을까? 발이 아프지도 않으면서. 저렴한 숙박비 덕에 관광을 하고자 한 것인가? 두 달의 시간을 갖고 왔다고 게을러져 두근거리던 순례길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인가?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하루 더 머문다고 순례자 여권을 내미는 것을 보고 알베르게의 호스피탈 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까미노에서 만난 아주 지독한 유혹에 우리가 넘어졌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부끄러움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가슴이 쓰리다. 오늘의 일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

호스텔에서 바라본 따르다 호스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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