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의 이해)
ㅗ9월 5일 부르고스(Burgos) 29.3km
아침 일찍 출발하는 사람들로 부산하다 보니 우리도 일찍 일어나 준비하고 출발했다. 지난번에는 걷지 않고 건너뛴 구간이라서 조금 설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에 고속도로와 자동차의 소음, 그리고 공장지대, 공항 근처 등등을 지나는 길이라고 알려져 있어 더욱 그렇다.
그래도 완만한 내리 막으로 이어진 평원을 4km 정도 힘들지 않게 걸어가니 첫 번째 아 헤스(Ages) 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파란색 정사각형 철제 판에 아 헤스 마을로 들어오는 여러 경로의 화살표들이 재미있게 그려진 푯말이 있다.
조금 더 걸어가니 깔끔하게 정리된 오래된 주택들이 이어져있고 약국을 표시하는 빨간 십자표가 붙은 집에는 붉은색 작은 화분들이 걸려있다. 그리고 산티아고 콤포스텔라까지 518km가 남았다는 숫자가 노란 화살표와 함께 순례자들을 반긴다.
이 마을의 모든 구역이 어제 잠잤던 산 후안 데 오르데가 수도원을 지은, 건축가였던 산 후안 데 오르데가의 작품들로 많이 꾸며져있다고 한다. 산 후안 데 오르데가는 산을 정비하고 저수지를 메워 다음 마을로 이어지는 길도 다져놓았다고 하고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Vena강 위에 놓인 돌다리도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
새삼 순례길을 위해 많은 후원을 했다는 산토 도밍고 칼사다 마을의 도밍고 성인이 생각났다. 천년길이라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위해 열정을 바친 분들의 덕을 멀고 먼 한국 사람인 내가, 그리고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받고 있다는 생각에 시대를 넘어 고마움과 함께 깊은 연대감을 느낀다.
흙보다는 돌들이 더 많은 숲길에는 잎새도 없는 보라색 꽃이 거의 땅에 꽂혀있듯이 피어있다. 이 척박한 땅에 피어있는 꽃을 보니 가장 낮은 자세로 바람을 피해 피어나는 그 지혜로움과 생명의 경외가 느껴진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진다.
언덕 정상에 서면 멀리 마을과 드넓은 평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돌무더기 위에 나무 십자가가 서있는데 오래전에 이 길을 걸었던 순례자들이 돌길을 올라오면서 하나씩 주워 들고 온 돌을 십자가 주위에 올려놓고 안전하게 순례길을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부터 이어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들고 올라온 돌은 없어서 근처에 흩어져있는 작은 돌을 주워 올려놓으며 같은 맘으로 기도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길이 작은 마을을 지나며 아스팔트 길이 되고 다시 흙길로 반복되는 것을 경험하며 리오 삐꼬(Cardenuela Riopico) 마을에 도착해 야외 탁자가 많은 카페에 들어갔다.
주스와 맥주를 한잔씩 주문해 마시면서 12km 가까운 길을 쉼 없이 걸어온 스스로를 대견해하며 따가운 햇살도 아랑곳하지 않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다시 걸어야 했을 때는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과 공장지대인 듯 어수선한 건물들이 여기저기 계속되고,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나무그늘도 없어 걷는 게 너무 힘들었다. 안내책에 리도삐꼬 마을에 알베르게가 있다는 정보만 믿고 카페에서 너무 여유를 부린 탓이다. 여유를 부리다 알베르게를 찾아갔을 때는 문에 영업을 안 한다는 공지가 붙어있었다. 할 수없이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고속도로 곁을 소음과 함께 걸었다. 2년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다시 걷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태양빛이 조금 누그러질 무렵 부르고스 입구의 주택가를 지나게 되고, 현대적인 건물들과 많은 차량으로 번화한 신도시를 거쳐 구시가지로 들어왔다.
지난번에 가족이 함께 왔을 때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내려 다리를 건너자 바로 구시가지였다. 이렇게 힘들게 걸어오는 순례자들이 있는 줄 모르고 가족들과 도로 주변에 있는 청동으로 만든 조형물 옆에서 사진을 찍고 감탄하며 대성당 뒤에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익숙한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높은 고딕 첨탑의 대성당을 보면서 그 뒤에 있는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내부는 깔끔하고 정돈된 현대적 시설이다. 순례자 여권에 도장 찍고 알베르게 사용료 계산하면 1회용 침대커버를 주는데 그것을 받아 신발 벗어놓는 곳에서 먼지투성이 신발을 벗고 , 스틱은 스틱 두는 곳에 잘 정리한 후 알베르게에서 신을 신발을 배낭에서 꺼내 신고 정해준 침대를 찾아간다. 이곳은 주방에서 요리할 수는 없고 식당에 갖춰진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워서 테이블에 앉아 먹을 수 있다. 빨래는 세탁실에서 하고 건조는 정해진 야외 빨랫줄에 널 수도 있고, 아니면 세탁기와 건조기에 빨래를 돌릴 수가 있다. 샤워실 역시 잘 구비되어 있어서 까미노에서 만나는 알베르게 중 상급에 해당한다.
정리하고 조금 쉬다가 2년의 시간 차가 느껴지지 않는 부르고스 구시가지를 둘러본 뒤 광장에 앉아 어린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걸 구경했다. 장난기 많은 남편은 아이들에게 말을 걸고 함께 사진까지 찍더니, 건물 기둥에 한쪽 다리를 대고 서서 신문을 읽는 청동으로 만든 남자의 조형물 옆에서, 그와 비슷한 포즈를 취하며 어린이처럼 환하게 웃어 보는 사람을 즐겁게 한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다 작은 성당에서 미사가 있는지 사람들이 들어가는 걸 보고 우리도 따라서 들어갔다. 여기는 지난번 왔을 때도 저녁에 미사를 참례했던 곳이다. 대성당에서는 특별한 날에만 미사가 있는 것 같았다.
스페인은 옛날의 영광을 보여주듯 마을마다 몇 개씩의 성당이 있고 장식이나 규모도 너무 화려하다 할 정도로 꾸며져 있는데 지금은 낡고 보존하는 비용도 많이 드는지 관광객이나 순례객들에게 모두 개방을 하지 않고 관람료를 받고 잠깐 들여보내거나 아니면 아예 문을 닫아 놓았다. 그리고 그중의 한 성당에서만 순례자들을 위해 미사가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주일이나 평일에도 지나가는 마을에서 혹은 머무는 마을에서 미사를 많이 참석할 수 있어서 다행이고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