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에서 자란다)
9월 7일 온따나스(Hontanas) 20.4km
동이 트기 전 어슴푸레한 마을을 벗어나 아스팔트로 이어진 길을 계속 걸으니 Calzadas 마을로 도로가 이어진다. 입구 표지판이 보이고 마을은 고요함에 잠겨있는 듯하다. 마을은 튼튼한 돌로 지어진 집들이 많았다.
우리는 열린 카페로 들어가 카페 꼰 레체 한 잔씩 주문해 먹으며 순례자들이 기념으로 놓고 간 물건들이 붙어있는 벽을 보았다. 각국의 화폐들과 함께 한국의 천 원짜리 화폐가 여기저기 있었고, 배낭에 달고 다니는 조가비, 한국의 신랑 각시 민속인형, 메모, 머물다 간 사람들이 적어놓고 간 감사 인사 편지 등이 한국어 또는 영어로 쓰여 함께 빼곡히 붙어있었다.
메세타지역을 걷기 전 자신이 갖고 있는 무언가를 덜어내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다시 시작하듯 주어진 길을 잘 걷고자 하는 마음의 다짐이었을까. 나보다 먼저 이 길을 지나간 이들의 흔적 속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동지애 같은 뭉클한 감정이 일어난다.
마을을 나오니 메세타(고원)로의 오르막이 시작되고 좌우가 밀밭으로 지금은 모두 추수를 마쳐 밑동만 누렇게 햇빛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들판 길을 걸었다. 1시간 이상 계속 이어지는 밀밭길을 걷다가 이번에는 밀밭 대신 해바라기가 화사하게 피어나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넓은 평원을 만났다.
지나온 길에서는 알이 모두 새카맣고 해바라기 대도 말라 비틀린 상태의 밭들이 조금 흉하게 보였는데 여기는 모두 싱싱하고 아름답게 피어 하늘을 보고 있는 모습이 활력 있고 따스해 보였다.
그것도 잠시, 계속되는 추수 끝난 밀밭 사이로 길이 이어지고 끝날 것 같지 않은 평원에 저 멀리 햇살에 반사된 황금색의 들판들 뒤에 마을이 보였다. 그동안은 오르막을 오르며 계속된 평원이 다시 내리막길로 바뀌며 오르니요스(Hornillos) 마을로 들어갔다.
단단한 돌로 지어진 오래된 집들 사이를 걸으며 마치 성벽처럼 계속 이어지은, 작은 창문 몇 개만이 있는, 밖에서 안을 볼 수 없는 전형적인 중세의 주택가를 지났다.
그리고 오르막으로 계속 이어지는 메세타 평원의 길을 걷고,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오자 아로요 산볼 마을의 키 큰 미루나무들과 작은 돌집이 보였다.
우리는 잠시 sanbol에 들러 시원한 물(물이 너무 차서 발이 시렸다)에 발 담그고 쉬었다. 이곳이 중세에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나병 요양소가 있었던 곳이라고 책에서 읽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흔적이 없고 낡고 작은 오두막 같은 건물이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하룻밤을 재워주는 알베르게로 운영되고 있는데, 2년 전 왔을 때 식구들과 이곳에서 별을 보기 위해 하룻밤을 묵었었다.
허름한 알베르게에는 2층 침대가 몇 개 있었고 머무는 사람들도 우리 식구 4명과 외국인 남자 2명뿐이었다. 주위에는 인적 없이 오로지 푸른 밀밭과 키 큰 미루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가 듣기 좋았었다.
지금도 시원하게 소리 내며 흔들리는 나무의 합창 소리가 좋다. 그때는 초행길에다가 외국인 남자 2명과 우리 식구뿐이라서 살짝 무서운 생각도 들었었지만 한밤중에 아들이 깨워줘 별들을 가깝게 볼 수 있었다. 은하수와 북두칠성을 그렇게 가까이 크게 본 적은 처음이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풍경이지만 허름한 알베르게는 여전히 문이 닫혀있고, 호스피탈 레에게 전화를 해야 와서 문을 열어주고 접수를 받는다. 대부분 여기서 자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찬물에 발을 담그고 앉았다가 떠난다. 우리도 일어나 다시 양말을 신고 시원해진 발 덕분에 가볍게 길을 나섰다.
오늘 걷는 길은 모두 메세타 지역으로 밀밭길이다. 사방이 온통 하늘과 맞닿은 척박한 땅에 밀과 보리가 자란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갈대가 바람에 뉘어지며 흔들리고 자갈길 옆으로 밭을 일구며 골라내었을 돌들이 쌓여있다. 마치 제주도 돌담같이. 가도 가도 끝없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오히려 아름다운 길을 걷고 있음에 감사하다.
척박한 땅에 피어난 보라색 엉겅퀴나 노란 민들레가 더 귀 해 보였다. 푸른 하늘과 추수가 끝난 누우런 밀밭들을 좌우로 두고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길을 걷는 것이라 고독한 길, 나를 돌아보는 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길이다.
그래도 우리는 san bol에서 발을 쉬고 와서 발걸음도 가벼워 고독한 느낌보다는 고요하면서도 마음이 충만한 그 무엇으로 채워지는 듯 기분 좋게 온따나스까지 한걸음에 달려왔다.
온따나스 초입에 추억이 묻어있는 알베르게가 있어 들어가 방을 배정받고 짐을 풀었다. 여기 역시 2년 전 비 오는 날 아침에 들려서 커피와 토르티야 등을 먹었던 집이라서 새삼 더 정감이 갔다.
방값 8유로씩, 저녁밥 9유로씩에 두 사람 예약하고 햇살 좋은데 앉아 피자와 맥주 한잔으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서 허기도 채워지고 음악도 흐르니 행복한 잠이 쏟아져서 잠깐 졸았다가 카카오 톡을 하고 있는데 6시에 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새들은 어느새 모두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가 종소리 끝난 뒤에 다시 종 옆으로 앉는다. 새들은 늘 여기 살아서 큰소리를 비켜갈 줄도 안다. 요란한 종소리가 궁금해서 물어보니 미사 시작을 알리는 소리라고 한다.
우리가 부랴부랴 준비하고 근처 성당으로 갔을 때 미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다행히 영성체를 할 수 있었다. 미사 후에 순례자들에게 신부님이 직접 나무십자가 목걸이를 하나씩 걸어주면서 축복해 주셨다. 그리고 한쪽에는 스페인, 한쪽에는 한글로 되어있는 미사 통상 문도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