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미노에서 알게 되는 것)
9월 8일 이때로 데 라 베가 (Itero de la vega) 21.5km
이른 아침 안개로 뿌옇게 보이는 들판을 까미노 표시를 보며 부지런히 걸었다. 해발 900미터인 온따나스(Hontanas)에서 800미터 이하로 완만하게 내려가는 들길을 걷다가 아스팔트로 길이 바뀌면서 직선으로 이어진 차도 옆을 걸었다. 차는 별로 다니지 않아 불편하지 않았다. 가다 보니 안내책에서 보았던 '산 안톤 수도원'의 모습이 안개가 거치며 환하게 나타났다. 커다란 아치 밑으로 차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도로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이어지고 있다. 중세 때 이 수도회의 수사들은 병에 걸린 순례자들을 극진히 돌보고, 또 도움이 필요한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도 제공해 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면서 까미노에 널리 알려졌었다고 한다. 지금은 남아있는 아치와 부서진 수도원 건물이 그들이 까미노에서 했던 일들을 웅변해주고 있다. 건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수도복을 입은 수사가 친절한 미소를 띠며 어딘가에서 다가올 것 같다. 여러 사람의 희생과 도움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남아있음을 다시 느끼게 한다.
수도원을 지나도 아스팔트 길은 계속 이어졌다. 길 양쪽으로는 햇빛에 누렇게 빛나는 밑동만 남은 밀밭 평원이 이어지고 앞으로는 멀리 언덕 위에 부서진 성이 보이고 밑으로 마을이 보인다. 아! 저 부서진 성을 보니 까스트로 헤리츠(Castrojeriz)가 가까이 왔음을 느꼈다.
남편은 까미노 안내책을 여러 번 읽어서 그런지 건물이나 지명을 잘 이해하고 있어 종종 내게 설명을 해준다. 오늘도 눈 좋은 남편이 먼저 보고 언덕 위에 있는 부서진 성을 가리키며 마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해준다.
까스트로 헤리츠 마을을 지나니 해발 900미터 높이의 언덕으로 올라가는 경사진 오르막 흙길이다. 나무도 거의 없는 약간 거무스레하게 보이는 언덕은 멀리서부터 우리를 질리게 한다.
언덕을 오르는 순례자들의 모습이 점처럼 보인다. 기운을 내서 오르며 잠시 뒤돌아 보고 하면서 계속 올라갔다. 모스 테라 레스(Mostelares) 언덕을 올라 바라보니 우리가 지나온 길이 한눈에 아득하게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니 붉은 기와지붕에 긴 의자를 만들어놓아 잠시 배낭과 스틱을 내려놓고 물을 마시며 쉴 수 있었다. 땀 흘리며 올라와 잠시 쉬어가라고 엉성해 보이지만 만들어준 누군가의 마음에 감사했다. 쉬면서 보니 여기저기 자신의 이름이나,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놓은 낙서들이 보였다. 낭만적인 남편이 그냥 갈 수 없어 십자가와 하트를 그리고 그 안에 우리의 이름과 오늘의 날짜를 적었다. 영어로, 한국어로, 다른 언어로 적어놓은 낙서 아닌 낙서들이 또 오늘 하루 우리를 기억해 준다.
언덕 정상에 올라 바라보니 끝없이 너른 빈 들판이 보이고, 우리가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가 걸어야 할 길이 구불구불 펼쳐져있다. '그래, 내려가는 길은 오르막보다는 조금 쉽겠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교우로 알고 지내는 형님이 먼저 60대에 들어섰을 때(그때 나는 40대 초반이었다)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오르막만큼이나 내리막도 중요해. 천천히 내려와야 다치지 않고 길을 다 걸을 수 있으니까. 나는 이제 내리막길에 들어선 나이지. 그래서 더 겸손하게 찬찬히 나를 돌아보면서 가고 있어.'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이제 내가 나이 60이 넘어가고, 남편도 현직에서 은퇴를 하고 나니 그 의미가 새롭게 나에게 주는 지침처럼 다가온다.
언덕을 내려와 이어지는 평지를 한참 걸어오니 Fietero 돌다리가 보였다. 다리 위에 올라 아래를 보니 강물이 흐르고 까미노에서 자주 보았던 아치형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니'PALENCIA'라고 써진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부터가 발렌시아 지방이 시작되는 것 같다. 계속 걸어 들어가니 아름다운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의 포플러 나무 잎들이 바람과 함께 연주하는 상쾌하고 즐거운 소리를 들으며 마을에 들어섰다. 동네가 시끌벅적하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마을 행사가 있나 보다. 어린이들은 붉은색, 흰색 등의 옷을 입고 어른들도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볼링 비슷한 것도 하고. 카페에서 음식과 술을 나누며 재미있게 사는 모습이 활기가 가득했다. 우리는 아주머니들끼리 모여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박수도 쳐주고 간단한 음식으로 요기도 했다.
까미노를 걷다 보니 대부분의 마을에는 광장이 있고, 거기에 큰 나무들과 벤치가 있다. 집은 단단해 보이는 돌로 지어졌고 창문 테라스는 꽃들로 화사하다. 창문에는 햇살이 뜨거워서 그런지 아니면 중세 때 자주 벌어졌던 다른 나라와의 전쟁 때문에부터 그랬는지 위로부터 내려오는 철제 버티칼(vertical) 블라인드가 있다.
까미노를 걸으며 늘 보는 풍경이다. 시골이지만 거리도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고, 마을 안에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도 않아 한가롭게 걷기 좋다. 까미노에 있는 마을이라 순례자들에게도 무척 친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