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생각이 안 나~)
9월 3일 벨로라도(Belorado) 23km
새벽 6시에 일어나 세면대로 가니 벌써 준비하러 나온 사람들이 여럿이 움직이고 있다. 이미 열린 문으로 보이는 다른 방의 침대에는 전날 밤 사용한 1회용 침대 매트리스 커버가 벗겨져있어 첫새벽에 떠난 순례자들의 부재를 보여준다. 그리고 중정 난간 아래층의 중앙 거실에는 어젯밤 늦게까지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흘려놓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어제도 단체로 온 사람들인지 아니면 까미노에서 만난 사람들인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10시가 넘어 자야 할 시간에도 꽤 소란스러웠다.
2년 전 봄에 우리가 처음 까미노를 걸을 때는 거의 접해보지 못한 풍경이다. 10시 전에 모두 조용했고, 당연히 그것이 순례길의 무언의 약속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계속 걷다 보니 혼동이 온다. 밤늦게까지 자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숙면을 방해하는 소란스러움을 여러 번 경험했기 때문이다.
걷느라 피곤하다 보니 그 소음에도 언제 잠들었는지 새벽이 될 때까지 푹 자고 일어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을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채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오랜 세월의 여러 이야기를 품은 복잡한 얼굴로 숙연하고 정겹다. 오로지 까미노 표시를 따라 나가는 순례자들의 발자국 소리만 고요한 가운데 크게 울린다.
대성당을 지나 차도 옆의 보도로 이어진 길을 걸어 마을을 벗어나자, 다시 너른 평야를 끼고 오르막길이 시작되었다. 아쉬움에 뒤로 돌아 이제 막 아침 햇살에 깨어나기 시작한 칼사다 마을을 멀리서 눈에 담았다. 조금씩 고도가 높아지는 길이었지만 완만해서 힘들지 않게 걸었다. 걷다 보니 저 멀리 패라 글라이딩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하늘과 산과 넓디 너른 누런 평원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같이 보였다.
그라뇽 마을로 들어서면서 2년 전 여기를 지날 때, 작은아들과 맛있는 쿠키 집이라고 책에 소개되어 있던 집을 우연히 발견하고 들어가 쿠키를 사서 먹고 간 기억이 있었다. 다시 그 집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고 지났다.
지방의 경계선을 알리는 긴 표지판이,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에게 레온까지 지나가게 될 마을을 보여주는 까미노의 루트가 사진과 함께 자세히 적혀있다. 우리가 지나온 길을 다시 되짚어 보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확인하면서 기념사진도 한 컷 찍었다. 마을을 지나자 바로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을 지나 다시 오르막을 한참 오른 뒤에 레 데실라 델 까미노(Redecilla del Camino) 마을에 도착했다. 알베르게와 카페를 겸하고 있는, 이미 떠난 순례자들로 한산한 야외 탁자에 카페 콘 레체를 주문해 배낭에 들어있던 삶은 계란을 곁들여 아침을 먹었다. 이른 시간에 시원할 때 걸으니 3시간을 넘게 걸었어도 그다지 갈증이나 허기가 심하지 않았다.
낡은 주택 옆에 붙여서 새로 지은 건물들과, 파아란 하늘에 구름이 몽실몽실 떠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마을을 지나 고속도로 옆으로 난 길을 걷다가 넓은 평원 옆을 걷기를 반복했다.
계속된 오르막길이었지만 경사가 심하지는 않아 수월하게 도밍고 데 라 칼사다 성인이 태어나 자란 Viloria마을에 들어갔다. 성인이 어릴 때 세례를 받았던 성당 세례 대가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까미노를 걷기 시작하고 몇 번 만났던 안나 씨 부부와, 그들과 함께 걷는 몇몇은 이미 부르고스에 들어가고 있다고 카톡이 왔다. 부지런히 까미노를 걷고 다른 곳을 관광하고 가기 위해 속도를 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까미노를 걷는 동안 그들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박하고 좋은 느낌의 사람들이었는데 무탈하게 잘 걷고 산티아고에 도착하시기를 바랐다. 출발할 때 처음 만나게 되고 한두 번 숙소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친밀감이 생겨 까미노를 걸으면서도 종종 서로 카톡으로 소식을 전하게 되고 오래도록 기억하게 된다.
계속되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평원을 걷기도 하고 오래된 마을을 지나기도 하면서 걷던 완만하던 길들이 숲길로 접어들면서 벨로라도 마을까지 내려가는 길은 자갈과 흙이 섞인 조금 미끄러운 내리막길 이어서 땀이 나고 힘이 들었다. 그렇게 많이 힘든 길은 아니었을 텐데 아마도 점심을 굶고 23km를 걸어왔더니 힘에 부쳐서 그런 것 같다.
힘이 들어 입구에 있는 사설 알베르게에 들어갈까 하다가 지난번에 가족과 함께 왔을 때 맛있게 먹었던 빠에야의 맛을 잊지 못해 다시 그 알베르게를 찾아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때는 비가 오는 중에 엉겁결에 들어가고, 마을 구경도 거의 못해서 그랬는지 맑은 날에 오니 전혀 새로운 곳이라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교구에서 운영하는 성당 옆 기부제 알베르게에 묵었다. 상냥한 호스피탈 레와 샤워실도 좋고 괜찮았다. 미사는 없을 수도 있다고 해서 마요르 광장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맥주를 시켜서 먹고 동네 구경을 다녔는데 미사를 알리는 성당의 종소리를 듣게 되었다. 우리는 붉은 얼굴 때문에 살짝 망설였지만 그래도 미사에 참석했다.
신부님이 특별히 순례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마련하셔서 기도하고, 노래 부르는데 신부님이 각자 우리가 잘 부르는 성가를 불러보라고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생각이 안 나고 휴대폰도 충전이 거의 떨어져 성가를 찾을 수 없어 난감할 때 함께 참석했던 강화성당 부부가 '참 아름다워라~~ 나라는~....'로 시작되는 성가를 부르길래 얼른 따라서 불렀다.
다른 외국인 순례자도 자신이 아는 성가를 불러 모두 화기애애하게 기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끝나면서 모두 함께 신부님과 사진도 찍었다.
까미노에 있는 마을의 성당에는 가끔씩 이기는 하지만 순례자를 위해 뭔가 함께 하고 싶어 하는 사제를 만나게 되어 좋은 경험을 하게 된다. 감사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