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아주머니들)
9월 11일 깔 사 디 아 데 라 구 에 사(Calzadilla de la Cueza) 17.5km
아침 7시 30분에 산타마리아 알베르게를 나서기 전 남편과 함께 배낭을 메고 스틱을 짚고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바치고 문을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 남편과 사소한 다툼으로 기분이 상할 때도 어김없이 출발 전에 함께 기도했다. 솔직히 서로의 마음이 엇갈려 있을 때는 함께 기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럴 때일수록 더 함께 기도해야 한다는 게 남편의 생각이었다.
아직까지 까미노를 시작하면서 아침부터 마음이 어긋난 적은 별로 없지만 가끔 남편이 퉁명스럽게 서두르라고 얘기하는 때에는 살짝 기분이 나빠 출발 기도 후 말없이 앞서서 길을 나선적은 한두 번 있었다.
남편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몸상태에 따라 그러는 거라 내가 느끼는 미묘한 감정을 잘 눈치채지 못하고 오히려 내가 무슨 일로 기분이 틀어졌냐고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걷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말을 걸고, 물을 나누어 먹고 간식을 먹으면서 서걱거리던 감정은 봄눈처럼 녹아버려 즐겁게 길을 걷는다.
오늘은 넓은 방에 1층 침대만 있는, 예쁜 꽃무늬 면으로 된 침대커버가 씌워진 침대에서 달콤한 잠을 푹 자고 일어났기에 두 사람의 기분도 날아갈듯하고 몸도 가벼워 기쁘게 기도하고 출발했다. 노란 화살표의 까미노 표시를 따라 강 위로 놓인 돌다리를 건너 마을을 뒤로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차도 옆을 걸었다.
도시를 빠져나가며 매일 밀밭만 보다가 오랜만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푸른 나무들을 보며 걸으니 기분도 상쾌했다. 가는 길에 San Zoilo 수도원을 지나면서 거무스름하게 변하고 바래진 수도원의 모습을 통해 지나간 수세기의 시간을 감히 느껴본다.
오늘 걷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의 없는, 끝없이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걷게 되고 마을도 거의 없어, 충분한 물과 간식을 준비해서 걸어야 되는 길이다. 계속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과 단단한 흙길 17.5km를 걸을 동안 잠시 쉬어갈 마을이 없다는 것은 마치 부모의 품을 떠나 홀로 세상에 던져진 느낌같이 막막해진다.
안내책자를 통해 마을이 없어도 계속 걷다 보면 도착할 마을이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은 애가 탄다. 처음 여기에 와서 걸을 때 드넓은 밀밭 평원을 끼고 걷는 것이 흥분되고 좋았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중세부터 내려오던 마을이든, 새로 까미노 순례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든 대체로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들러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나 가끔 이렇게 오로지 양쪽으로 밀밭 길이, 그것도 이미 추수가 끝나 잘린 밀대만 남은 평원 같은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간혹 가다가 해바라기 밭이 넓게 나타나긴 하는데 비가 오지 않는 건기가 계속되어서 그런지, 아니면 거둘 때가 되어서 그런지 모두 말라 꺼멓게 타 있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는 막막한 마음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문득 군대에서 막 제대하고 온 작은아들을 서울에 작은 원룸을 하나 얻어 거기서 학교를 다니게 하고 왔는데 그 아이도 지금 나처럼 이런 기분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사이에 사는 환경이 갑자기 바뀌어버려 평소에 말수가 적어 내게 얘기하지는 않지만, 적지 않게 적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남편의 정년퇴직이 언제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서로 별다른 준비를 해놓지 않아 2년 전 이 길을 걸으면서도 혼자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다. 금융기관에 다닌 남편은 의외로 재테크에 대해서 상당히 보수적이고 소극적이어서 우리는 그저 대출 없이 사는 것만이 최고인 줄로 알고 살았다.
다행히 서울의 좋은 지역에 아파트 청약이 당첨되어 큰아이는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작은아이는 유치원부터 그곳에서 자랐다. 우리보다 월등한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를 갖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 특별할 것 없는 나는 약간 위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래 살면서 성당의 교우들과 교류하며 별 욕심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2년 전 이 길을 걷고 돌아갔을 때, 집을 정리하고 뭔가 정년퇴직에 대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지금 생각하면 너무 적은 가격이지만 그 당시에는 괜찮다고 해서 팔고, 지금 살고 있는 일산 집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나도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면서 '50 넘어서 타 동네로 이사 가는 사람은 어리석다'라고 하신 시댁의 큰 형님 말씀이 공감이 가서 많이 후회했었다. 동네에서 오다가다 마주치며 반가워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산다는 것은 마치 바닷물로 둘러싸인 섬에 혼자 남겨진 느낌이었다.
걸어도 걸어도 마을이 없는, 오로지 맑고 파란 하늘과 맞닿아 있는 평원을 걸으며 서울에 두고 온 작은아들에 대한 애잔함이 밀려왔다. 그래도 큰아들은 결혼을 해서 함께 삶을 나누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 환경의 변화에도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씩씩하게 살고 있어 다행한 마음이다.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하는 듯 그래도 가끔 길가에 포플러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가 길을 걷는 나와 순례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거의 10km 가까이 가서야 제대로 쉴 수 있는 벤치가 나타나서, 스웨덴에서 오신 60대(67~68세) 친구 두 분이 걷다가 이미 쉬고 계신 곳에 함께 짐을 내리고 앉아 인사를 나누고 사진도 찍었다. 그동안 지나온 알베르게에서 한두 번 만났었기 때문에 긴 길을 걷다가 쉬게 되는 곳에서 만나니 더욱 반갑다.
유럽 사람들은 스페인이 가깝게 있어서 산티아고 길을 수시로 걷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리가 워낙 멀다 보니 한번 걸을 때 한 달 이상을 와서 거의 끝까지 완주하고 가는 사람이 많은 듯한데 유럽인들은 구간 구간을 나누어 짧게 오기 때문에 배낭도 가볍게 오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배낭 딜리버리도 거의 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시간적인 여유가 생겼을 때 친구와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다가 중간에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분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이분들도 레온까지만 걷고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다.
두 분은 충분히 쉬었다고, 천천히 쉬고 오라고 자리를 비켜 주시며 먼저 출발하시고, 우리는 간식과 물을 꺼내 먹으며 지나가는 순례자들과 '부엔 까미노' '올라'로 인사했다. 해가 더 뜨거워지기 전에 Cueza마을의 알베르게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해서 다시 배낭을 정리해 메고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지평선을 바라보며 걸었다.
길이 험해도 중간에 마을이 있으면 그래도 위로가 되고 힘이 나는데 아무리 걸어가도 멀리라도 보이는 마을이 없으니 더 힘이 안 나는 것 같다. 그러다 갑자기 지평선을 넘어가니 짠~하고 마을이 나타났다. 신기했다.
Cueza마을은 약간 움푹 들어간 분지에 있어서 우리가 걸어오는 동안 보이지 않았던 거였다. 작은 마을이고 도로 앞 한쪽에 공립 알베르게가 하나 있어 들어갔다. 그런데 쉬고 오라고 먼저 떠나셨던 스웨덴 아주머니들을 여기서 또 만났다.
길을 걷다가 보면 자주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분들 도 그렇다. 우리 부부와 걷는 속도가 비슷해서 그런가 보다. 영어를 좀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으면 만나는 외국인들과 대화도 조금 더 길게 할 수 있었을까? 글쎄... 지금 이렇게 만나서 인사하고 가볍게 나누는 정도가 오히려 낫지 않을까? 하는 여러 생각이 스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