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은 다 지나가리라)
9월 14일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 19.5km
동이 트는 이른 아침 마을을 나와 차도로 이어지는 까미노를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두 갈래로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까지 갈 수 있는데 오늘도 우리는 전통적인 까미노 구간을 걷기로 했다.
2년 전에 소음이 적다는 우회길로 걷다가 오히려 길을 잘못 찾아 고생했던 경험 때문에 이번에는 안내책에서 걷기 힘든 길이라고 설명했어도 무조건 전통적인 순례길을 따라 걷는다.
요즘은 알베르게에서 만나는 한국인도 거의 없고, 한국인을 만나 신기해서 말을 해보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도 없어 우리끼리 조용히 걷고, 머물고, 떠난다.
처음 순례길을 걷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누구나 대단한 것을 시작하는 즐거움과 살짝 흥분되는 기분으로 만나는 사람마다 말을 걸거나 알은체를 하면서 길을 걸었다. 배낭의 무게도 무겁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감탄으로 하루하루를 걸었다.
그리고는 어느 때부터인가 모두 조용해진다. 각자의 속도에 맞춰서 빨리 걸어가는 사람들은 앞서가고, 우리같이 천천히 걷는 사람들은 계속 뒤로 쳐진다. 출발할 때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던 사람들이 이제는 점점 까미노에서 만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또 인사를 하고 또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고 하면서 자신들만의 순례를 시작한다. 까미노도 초록색을 보기 힘든 길이 많아지고, 끝없는 밀밭 평원을 사이에 두고 아스팔트 차도를 한 줄로 걸어야 되니 단조로워 등에 멘 배낭의 무게를 느끼는 것만이 유일한 깨어있음이 된다.
오늘도 13km 정도를 걸어가야 작은 마을을 만날 수 있다. 거기까지 이렇게 평탄하지만 아스팔트 차도를 걸어가야 한다. 양쪽으로 계속되는 추수 끝난 밀밭 평원과 파란 하늘이 만나는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다행히 자동차는 가끔 지나가서 소음이나 위험을 느끼지는 않는다.
저 멀리 마을이 보인다. 송전탑이 보이고 직사각형의 높지 않은 타워에 순례자의 그림이 흰색으로 그려져 있어 멀리서도 희미하게 보인다. 보이긴 해도 실제로의 거리는 멀어 한참을 걸어야 만나게 되는 마을이다.
걷는 길에 종처럼 생긴 조그만 돌 위로 쇠로 만든 작은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 앞에 누군가 꽂아놓고 간 짙은 분홍빛 조화인 카네이션이 꺾인 갈대와 함께 꽂혀있다. 황량한 빈 들에서 마음이 따뜻해지고 미소가 지어진다. 다른 순례자들도 이 길을 지나며 나와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하나 둘 제각기 생긴 돌멩이들이 주위에, 종처럼 생긴 돌 위에 얹혀있다.
그로부터 1시간 반 이상을 걸어 레리에 고스(Reliegos) 마을에 들어갔다. 알베르게와 카페를 겸하는 곳에서 카페 콘 레체와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배낭을 벗고 어깨를 쉬게 하고 등산화도 벗어 발도 쉬게 한다.
오르막 내리막이 있어도 흙길은 발을 피곤하지 않게 하는데 변함없이 이어지는 아스팔트 차도는 눈도, 발도 지치게 한다. 우리의 삶이 희, 노, 애, 락이 있는 까닭도 이런 길을 걸으며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 2시간 안에는 오늘 머물 물라스 마을에 도착할 테니 영원할 것 같은 고통도, 영원할 것 같은 즐거움도 모두 지나간다는 말이 이해된다. 우리가 걷는 까미노는 길에서 우리 인생의 파노라마를 화려하게도, 고독하게도 펼쳐주면서 우리의 생각을 깨우고 있다.
드디어 만시야 데 물라스(Mansilla de Mulas) 마을에 들어왔다. 과거에는 상인, 목축업자 농민들의 중요한 시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융성했던 마을은 이제는 지친 순례자들을 쉬게 하는 여러 가지 편의시설을 갖춘 조용하고 아늑한 마을이다.
우리는 입구에 아기자기 귀엽게 꾸며놓은 사설 알베르게가 있었지만 마을 안 쪽으로 더 걸어가 공립 알베르게에 5유로씩 내고 순례자 여권에 도장받고 들어갔다. 빠르게 배낭을 벗고 침대에 1회용 매트리스 커버 씌우고, 조금 있으면 씨에스타 시간(스페인의 낮잠시간)에 걸려 슈퍼가 닫힐 시간이라 장부터 보았다.
오늘 머물게 되는 알베르게는 밖에서 보는 것처럼 내부도 깔끔하다. 주방도 사용할 수 있어 샤워하고 빨래하고 나서 쉬다가 점심 겸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여름에서 가을까지는 유럽 사람들이 휴가 내어 순례길을 많이 걸어서 그런지 시설이 좋은 알베르게를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좋은 사설 알베르게는 더 일찍 마감되고 그럭저럭 한 공립 알베르게도 늦으면 자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웬만하면 무조건 접수하고 들어오는 편이다. 다행히 버그와의 인연은 아직 없다. 와이파이도 잘 되어 힘들게 걸어온 길에 대한 보상처럼 만족했다.
알베르게에는 몇 가지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이 그림은 마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낡고 오래된 성벽과 과거에는 성당이 여러 곳이었는데 지금은 2곳만 남아있다고 한다. 내일 아침에는 아마도 그림에서 보이는 저 아치문을 걸어 나가게 될 것이다.
이른 저녁을 먹은 뒤 마을 구경을 나갔다. 여기저기 둘러봐도 아는 얼굴은 하나 없지만 오며 가며 즐겁게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미소로 인사하면서,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이라 산타 마리아 교구 성당에서 저녁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다. 감사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