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모든 길이 다 아름답지는 않다

(선택은 너무 어려워)

by 구슬 옥

9월 16일 비야 당 고스 델 빠라모(Villadangos del Paramo) 20.5km

굳게 닫혀있는 상점 골목을 지나는 까미노 표시를 따라 길은 광장으로 이어지고, 스페인의 자랑스러운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만든 건축물인 까사 데 보띠네스(Casa de Botines) 앞을 지나게 되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 건물은 가우디 건축물에서 볼 수 있는 디자인이라 금방 건축가가 가우디 란 걸 알 수 있다. 모서리 부분에 귀여운 원통형의 기둥 위로 고깔모자 같은 탑이며 검은 돌판으로 된 지붕이며 창문틀이 섬세하게 디자인된 동화 속의 작은 성 같은 느낌이다.

까사 데 보띠네스-가우디 건축물

산 마르셀로(Iglesia de San Marcelo) 성당을 지나니 까스띠야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라고 안내책에서 읽은 로스 구스 마네스 저택(Palacio de los Guzmanes)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현재는 스페인 문화자산으로 선정되었고, 레온 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건축양식에 대해 문외한이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창문이나 현관으로 보이는 입구의 모습도 독특하게 디자인되어 있는, 시간이 지나면서 흐려진 벽돌의 색깔이 보기 좋았다.


까미노 표시는 복잡한 도로로 레온 시내의 현대적 건물들과 상가 사이로 계속 이어졌다. 다행히 오늘은 토요일이라 아침에 출근하는 차량으로 복잡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2년 전 우리가 이곳에서 머물고 떠날 때는 출근차량과 학생들의 통학으로 도로며 차도가 가득 차서 한 걸음씩 걸어 나가기가 힘들었다. 이번에는 도로도 한산하고 차도에도 차량이 많지 않아 여기저기 구경하며 걷는 길이 즐겁다.


산 마르꼬스(San Marcos) 광장으로 들어가면서 길게 이어진 르네상스식 건축물인 산 마르꼬스 성당과, 중세에는 순례자를 위한 병원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고급 호텔로 용도가 바뀐 건물 등이 나란히 이어져있는 산 마르꼬스 단지 앞을 지나게 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스페인의 동쪽에서 서쪽까지 옆으로 길게 이어진 길이다. 그래서 까미노에 있는 도시에서 오래된 건축물과 성당, 수도원 등을 보게 된다. 이것이 순례자들에게는 잠깐이나마 남아있는 중세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고, 그 시대의 신과 인간이 하나로 연결된 삶을 보게 한다.

산 마르꼬스 성당이 있는 광장에서

우리는 마르꼬스 광장 앞에 지친 몸을 돌 십자가 기단에 기댄 채 고개를 젖혀 십자가를 바라보는 순례자 조형물 옆에 지치지 않은 몸을 내려놓고 십자가 대신 카메라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다.

천 년이란 시간의 흐름 뒤에 변화된 순례자의 모습으로.


까미노 표시가 복잡한 도시의 신호를 따라 여러 번 차도를 건너도록 되어있어 조금 지쳐 갈 무렵에 1505년 성모님이 발현한 곳에 지었다는 비르헨 마을의 '까미노의 성모 성당'이 보였다. 남편은 미리 안내책자에서 성당에 대한 글을 읽었는지 금방 성당을 발견하고 나를 채근해 서둘러 들어갔다.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성당은 그동안 보았던 스페인의 성당과는 달라 조금 낯설었다. 아마도 현대에 들어와 재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성당의 앞면에는 중앙에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의 모습과 성모의 양옆으로 예수의 12제자를 청동으로 만든 조각품이 있다.


성당에 들어가 잠시만 머물다 나왔다. 복잡한 도시의 길을 정신없이 지나오다 보니 성당 안에 들어가서도 차분히 기도하게 되지가 않았다.

까미노의 성모 성당에 많은 순례자들이 들려가고 있다

이제 두 개의 화살표 중 하나를 선택해 걸어야 하는 어려운 시험이 남았다. 2년 전에 왔을 때는 고속도로의 소음이 싫어 우회도로를 걸었었다. 흙길로 되어 조용하고 가끔 마을도 나와 잠시 쉬기도 하면서 즐겁게 잘 걸었다. 그러다 까미노 표시가 계속 보이지 않아 불안하게 걷다가 비 오는 늦은 오후에 알베르게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어, 오늘은 반대로 전통적인 길을 택해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길을 걷는 내내 트럭과 자동차들의 소음과 매연과 먼지로 최고로 힘든 길을 걷게 되었다. 중간에 마을이라기보다는 순례자를 위한 bar 인지 고속도로 옆으로 가게가 하나 있어, 음료를 사서 먹으면서 2년 전 우회도로를 택한 것이 그래도 잘한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힘든 길을 걷지 않았기에 우리는 순례길이 힘들지만 아름답게 기억되었고, 그래서 남편은 한번 더 걸어봤으면 하는 소망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힘들었던 기억은 잊히고 아름다웠던 길만 새록새록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둘째 시누님도 그래서 함께 걷고자 하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까미노뿐 아니라 루르드 성지와 파티마 성지, 그리고 아빌라 등 여러 곳을 다니는 두 달의 여정이다 보니 이번에는 우리만 간다는 남편의 결심에 많이 실망하셨다. 그러나 생각보다 걷기 힘든 길이 꽤 있었음을 한국에 돌아가 만나면 꼭 얘기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20km 이상 도로 곁을 걷다 보니 피곤해서 마을이 나타나자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겠다는 생각에, 초입에 있는 알베르게에 7유로씩 내고 들어와 빨래하고 쉬고 있는데 젊은 수진부부 가 들어왔다.


이 사람들도 도로의 소음에 지쳐서 더 걸으려다 들어온 듯했다. 앞으로는 못 보겠구나 생각했다가 또 만나니 오랜만에 보는 것처럼 너무 반가웠다.


그런데 수진 씨가 어떤 외국 남자와 영어로 언성을 살짝 높이며 대화를 하는 게 들린다. 수진 씨는 포르투갈어를 대학에서 전공해서 그런지 스페인어나 영어도 꽤 잘한다. 상냥한 수진 씨가 언성이 조금 높아진 것은 무슨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살짝 상기되어 휴게실로 나온 수진 씨에게 눈짓으로 상황을 물었다. 아까 언성이 높아진 외국인은 다른 알베르게에서도 몇 번 만났던 사람인데, 그때마다 한국인을 깔보는 듯한 시선과 말투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또 만나서 부닥치면서 수진 씨가 이번에는 참지 않은 듯하다. 아마도 오늘은 서로가 다 힘든 길을 걸어와서 불쾌지수가 높아져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나 바레 테'에서 만났던 덴마크 남자도 태도가 나빴는데 까미노를 걷다 보면 가끔 이런 사람들을 마주칠 때가 있다. 계속 길을 걷다 보면 사람마다 자신의 몸 상태에 따라 신경이 예민해지고 배려심이 적어져 이런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그런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는 것이다. 수진 씨는 그 사람의 무례함을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어서 한마디 해줬다고 했다. 영어를 잘하는 수진 씨가 유창하고 야무지게 한마디 했을 테니 모르긴 해 도 그 역시 꽤 놀랐을 것이다. 나는 잘했다고 토닥이면서 수진 씨 부부와 카모마일 차를 한잔씩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0. 미리 포기하거나 겁내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