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같은 길 다른 시간 다른 모습

(참 아름다워라~)

by 구슬 옥

9월 21일 엘 아세보(El Acebo) 17km

7시 30분 성시간(성무일도) 참석 후 신부님께 출발하려 한다고 얘기하니 섭섭해하신다. 9시 미사에 참례해서 영성체도 하고 축복기도받고 가면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가득하신 듯하다.


그러나 부족한 우리들은 이른 아침 시간에 걷는 걸음이 속도가 붙는지라 보통 때처럼 출발하고자 했다. 배낭까지 메고 스틱을 들고 서 있는 우리들을 더 이상 잡지 못하시고 신부님 께서 우리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 기도를 해주셨다.


걷다가 생각하니 신부님(클레멘스)과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고, 식사 한 번을 못 한 것이 마음에 걸리며 죄송했다. 평소에도 신부님들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없이 우리 부부만 신부님을 만나 식사를 하거나 뭔가를 얘기하는 게 사실 긴장되는 일이기에 늘 용기가 필요했다.


이제는 60이 넘은 나이이니 조금 더 편안하게 부족한 모습은 부족한 데로 보여주면서 마음을 열고 만나도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 실없는 농담도 신부님께 하면서 거리 감 없이 지내는데 왜 우리 부부는 그게 안되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도 무겁고 마음이 무거워서 그런지 계속 오르막으로 걸어야 하는 길에 속도가 붙질 않는다.


어제 하루 까미노를 걷지 않아서 그럴 거라고 핑계를 돌리며 올라가는데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까미노를 걷고 있는 외국 여성분을 만났다. 집에 오랜 시간 두고 올 수가 없어서 데리고 왔다고, 그래도 혼자 걷는 것보다는 위로가 된다는 그분은 등에는 배낭을 메고 허리에 강아지의 줄을 맸다.


얼굴은 어린아이처럼 환하고 수줍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작지만 주인을 잘 보살피며 앞서 걷는 강아지의 모습도 의젓해 보여 함께 웃으며 '부엔 까미노' 하고 지나왔다.


힘들게 올라 포세 바 돈에 도착하니 소떼들이 무리 지어 풀을 먹고 있는 데 그 모습이 평화롭다. 한국의 소처럼 누렁소가 귀에 종을 매달았는지 가끔 소리가 나고 함께 움직이며 너른 풀밭의 풀들을 자유롭게 먹고 있다.

주인을 이끌며 까미노를 걷는 강아지와 순례자

저만치 폰 세바 돈(Foncebadon) 마을 입구에 관광버스가 서더니 배낭을 메고 말끔한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내려 Bar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의 옷맵시 치고는 너무도 깔끔하고 배낭도 가벼워 보인다. 자세히 보니 한국인들이었다. 아마도 유럽에 성지순례를 왔거나 여행하면서 까미노 길도 살짝 경험 삼아 걸어 보는 사람들 일 것이다. 사리아부터 시작해서 100km만 걸어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여행 안내자의 인솔을 받으며 작은 배낭에 물이나 간식을 넣고 걸을 준비를 훌륭히 마친 듯한 모습들이 긴 길을 걸어온 순례자들과 섞이면서 묘한 부조화를 보인다.


그렇지만 각자의 모습으로 순례하는 것이고 또 이렇게 와 보고는 다음에 용기를 내어 처음부터 순례길을 걸을 수도 있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누가 옳고 그름이 있으랴. 각자의 사정대로 잠깐 맛만 본들 어떠랴. 우리 모두 각자의 까미노를 걸을 뿐이다.


폰 세바 돈을 지나 1500미터 언덕 위에 높이 세워져 있는 철 십자가(Ceuz de Hierro) 앞에서 나는 무겁게 갖고 온 나의 이기심과 욕심과 어리석음과 게으름과 사랑 없음을 모두 주님께 봉헌하고 빈 마음이 되어 주님을 만나고픈 또 다른 욕심을 바랐다.


철 십자가 주위에는 순례자들이 두고 간 여러 물건들과 사진들로 가득했다. 무언가를 비우고자 하는 순례자의 마음이 모여있었다

언덕 정상의 철 십자가(Cruz de Hierro)

철 십자가를 내려와 조금 더 걸어가니 연보랏빛 꽃잎만 피여 있는 군락지를 만났다. 높은 언덕 위라 바람이 많이 부니 꽃이나 풀들도 땅에 가장 가깝게 붙어 나왔다.


지난번에 돌무더기 속에서 피어있는 이 꽃을 보았을 때 힘들어 표정 없던 내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마음이 따뜻했던 기억이 난다. 오늘은 이렇게 군락으로 피어있으니 더 예쁘다.


바람을 피해 낮게 낮게 피어나는 꽃들의 지혜는 어디서 온 것일까? 옆에 쉬어갈 수 있는 돌로 지은 쉼터에 앉아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다시 아스팔트 포장이 된 내리막 길을 지나는데 울긋불긋한 깃발과 요란한 팻말들이 만하린에 있는 알베르게를 알리고 있다. 웬만한 사람들은 저곳을 갈 것 같지 않지만 호기심 있는 누군가는 오늘 저곳에서 묵으며 새로운 까미노의 추억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만하린을 지나면서 완만한 오르막으로 1500미터 언덕을 오르고 그다음부터는 계속 비탈진 내리막 길이다. 앞을 보니 우리가 올라온 길과 맞은편에 펼쳐진 굽이굽이 이어진 산의 모습들이 아름답다.


엘 아세보로 내려가는 길은 조각난 돌들이 많은 내리막길이라 몹시 발이 피곤했다. 발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눈은 파란 하늘과 펼쳐진 경치들을 보게 된다. 뒤따라 내려오는 남편의 조심하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잠시 뒤돌아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번씩 웃어주면서 그렇게 4km의 비탈진 내리막길을 걷는다.

20170921_132918.jpg 만하린을 지나 다시 1500미터 언덕을 오르며 걸어온 길과 맞은편 산등성을 바라본다

2년 전에 이곳을 비를 맞으며 걷던 생각이 난다. 그땐 비까지 맞으며 진흙길을 돌을 밟으며 참으로 용하게도 잘 내려왔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 걷는 길이라 두려움에 긴장도 되어 더 조심스레 걸었던 것 같았다.


산 위에서 건너편 산에 쌍무지개가 뜬것을 보고 환한 얼굴로 탄성을 터트리며 사진을 찍고 아마도 저 쌍무지개는 천사들의 까미노인가 보다고 얘기했었다. 맞은편 산등성이에 보라색 꽃들이 피어 있어 마치 진달래, 철쭉이 피어 있는 듯 아름다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나무며 풀들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식물의 싱그러운 모습을 보기 어렵다. 분명 길은 같은 길인데 다른 시간, 다른 모습의 길을 걷고 있다.


내리막 길을 잘 내려와 엘 아세보 마을 안으로 걸어오면서 여전한 모습의 마을이 정겹다. 이층으로 지은 오래된 돌집의 테라스에 붉게 꽃이 핀 화분들도 예전과 같아 다시 한번 서서 올려다보면서 이곳은 시간이 머물고 있는 느낌을 갖는다.


시간은 오후 2시가 벌써 넘어서 오늘은 여기 아세보 마을 끝에 쯤 있는 호텔 같은 알베르게에 들었다. 씻고 빨래해서 널고 오랜만에 알베르게에서 사 먹는 맛있는 저녁까지 먹고, 석양까지 바라보면서 너무 아름다워 사진에 담을 려고 하니 눈으로 보는 것만큼 예쁘지 않다.


2년 전에도 비를 맞으며 산을 내려와 알베르게를 찾아 헤매다가, 거칠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기적같이 이 호텔 같은 알베르게를 보고 들어와, 젖은 우비를 벗고 거실 벽난로에서 따뜻하게 몸을 말리던 생각이 난다.


피레네 못지않게 아름다운 산들의 모습과 붉게 펼쳐지는 노을과, 국기게양대에 걸려 펄럭이는 여러 나라 국기 사이에 눈에 띄게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면서 우리는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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