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천년의 거대한 성채

(매일매일 에는 어떤 좋은 것이 있다)

by 구슬 옥

9월 22일 뽄 페라다(Ponferrada) 15.5km

이른 아침 마을을 지나면서 보니, 우리가 어제 잔 곳은 엘 아세보 마을에서 조금 벗어나 암브로스 마을 초입에 몇 년 전 새로 문을 연 호텔 같은 알베르게였다.


2년 전에도 엘 아세보 마을에서 마땅한 알베르게를 찾아보다 포기하고, 아세보 마을을 벗어나 언덕을 내려가다, 쏟아지는 비를 피하기 위해 Bar를 찾던 중 발견했기 때문에, 우리의 기억 속에는 엘 아세보의 멋진 알베르게라는 추억으로 있었는데, 오늘 다시 걷다 보니 암브로스 마을이 이어지고 거길 지나자 가파른 비탈 계곡길이 계속되었다.


2년 전에는 우비를 쓰고 비가 쏟아질 때 이곳을 지나면서 조금은 두려워하며 혹시라도 미끄러지게 될까 힘을 줘 스틱을 짚고, 서로를 챙기며 천천히 내려갔던 기억이 새롭다.


하지만 오늘은 거의 한 달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아 계곡은 바싹 말라있고, 허여멀건 바위와 돌들은 순례자들이 걸어내려 가기에 미끄럽지도 않아 수월했다. 자갈과 진흙길이었던 내리막길도 흙이 누렇게 말라 자갈돌을 밟지 않으면 미끄럽지 않았다.


계곡을 거의 내려가니 멀리 몰리나 세카 마을이 보인다. 여기부터는 아스팔트로 연결되고 뽄페라다 까지는 평원을 걷듯 걸으면 되었다. 생각보다 빨리 경사가 심한 계곡길을 잘 내려왔다. 아무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벼운 몸으로 걷게 되는 첫 길이어서 집중이 더 잘되고 몸 상태도 최상이라 쉽고 빠르게 내려온 듯하다.

계곡을 내려와 몰리나 세까 마을로 들어가며

우리는 까미노 길 구간을 정할 때 될 수 있으면 까다로운 길을 가야 할 때는, 적게 걷더라도 그전 마을에서 쉬고 최상의 컨디션으로 가파르거나 까다로운 길을 걸었다. 그래서 그동안 큰 어려움 없이 계속 까미노를 걷게 되는 것 같다.

주택에 중세 기사 문장이 달려있다

튼튼한 돌로 만든 로마네스크식 돌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니 중세 귀족들의 문장이 새겨진 집들이 보인다. 세월이 지나면서 중간중간 보수했을 거 같은,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집들이 깔끔하고 예쁘다.


산을 내려오면서 보았던 교구 성당도 들렀다 왔으면 좋았을 텐데 잊은 채로, 중간에 아침을 먹기 위해 들어간 가게는 나무판에 글을 써서 여기저기 장식하는 것으로 까미노 길에 지친 순례자들을 응원했다.


'Every Day May Not Be Good,

But There Is Something Good in

Every Day'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까미노를 걷는 매일매일이 항상 좋지는 않다. 간혹은 너무 힘들기도 하고 남편하고 사소한 걸로 기분이 상해서 말없이 걷기만 하는 시간도 있다.


그러나 또 걸으면서 매일매일 좋은 것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서로 싱겁게 웃으며 화해하고, 소소한 간식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고, 아름다운 풍경에 와~ 환호를 하고, 까미노 길에서 만나는 외국인 순례자들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고 생각하게 한다.


주택가를 지나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니 포도밭 사이로 까미노가 이어졌다. 이미 탐스럽게 익은 포도들을 언제 수확하려는지 보이는 포도밭마다 잘 익은 포도송이로 가득하다. 맛보았던 포도의 달콤함을 생각하며 눈으로만 포도를 요기하고 이곳을 넘어가니 뽄페라다로 이어지는 아스팔트 도로가 보였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도로 쪽이 아닌 멀리 농가가 함께 있는 길로 죽~ 돌아서 가느라, 뽄페라다의 주택가를 멀리서만 바라보면서 한참을 구불구불 걸어 들어갔던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과감히 차도 옆으로 이어진 까미노 길을 선택해 걸었다.


걷다 보니 크고 아름다운 집들이 즐비한 주택가를 지나고 현대적인 건물들로 빽빽한 뽄페라다 도심으로 들어가게 되어, 지난번에 걸을 때 보지 못한 시내 구경을 두루두루 하면서 구시가지로 들어갔다. 가는 중에 은행에 들러 현금도 찾고, 초등학교를 지나며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놀며 쉬고 있는 학생들도 보았다.


시계탑이 있는 종탑의 아치문을 지나니 성모 성당과 시청이 있고 여러 조형물이 있는 번화한 광장으로 이어졌다. 지난번 왔을 때는 이곳을 지나가지 않아 뽄페라다 시가지를 보지 못하고, 수도원 알베르게 근처에서만 돌아다니다 다음날 성채 뒤로 해서 다음 까미노로 떠났던 것 같아, 오늘 우리가 선택한 길이 제대로 뽄페라다 도시를 보고 느끼고 갈 수 있었다.


광장을 지나면서 거대한 돌로 쌓인 성채를 보았다.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템플 기사단 수도회에서 만들어, 밤낮으로 수사들이 성채를 지키며 이곳을 지나는 지친 순례자들을 보호해주려 했다니 가슴이 뭉클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천년의 시간이 이어진 길이라는 게 새삼 더 실감이 났다.


우리는 이번에는 사립 알베르게에 머물까 생각하다가 2년 전의 추억이 새겨진 수도원 알베르게에 들어갔다. 4명이 묵을 수 있는 이층 침대 2개가 있는 작은 방이었다. 침대 정리를 하고 씻고 빨래해서 널어놓고 아까 들어오면서 보았던 광장으로 다시 가서, 성모 성당에 들어가 촛불 봉헌하고 잠깐 기도하고 나왔다.


안내책을 읽어보니 여기 바실리카 성모 성당 앞에 있는 떡갈나무 성모에는 신비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 한다.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과 떡갈나무의 성모자 상

어떤 나무꾼이 템플 기사단원에게서 성을 지을 때 대들보로 쓸 나무를 부탁받았다. 그가 나무를 베려고 숲으로 갔을 때 이상한 빛이 큰 떡갈나무에서 나오는 걸 보고 기사단에게 알렸다. 그들이 가보니 큰 떡갈나무의 구멍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이 있었다고 한다.


조심히 나무를 잘라 성모상을 가져오고 이 성모상을 위해 성전을 지은 것이 엔시나 바실리카 성모 성당이고, 엔시나의 성모를 이 지역의 수호성인으로 모셨다고 한다.


우리는 성벽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간단한 음식과 와인을 마시며 여유 있게 뽄페라다에 다시 온 감회를 즐기다가 성채 안으로 티켓을 끊고 들어갔다. 밖에서 보는 것도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지만 들어와서 보니 훨씬 더 넓고 크고 높았다.


저 멀리 근방의 마을이나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옆으로 더 높이 올라온 집들과 조금씩 깨어진 돌 사이로 풀도 자라고 있고, 성채 여기저기가 보수된 흔적들로, 중세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함께하고 있는 뽄페라다 성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채에 올라 성루로 올라가기 위해

성채를 나와 동네 구경을 하며 다니다 슈퍼에 가서 저녁 식재료를 사고 내일 먹을 물과 주스도 사서 알베르게로 돌아왔다. 알베르게 안은 도착 해서 이미 식사를 하고 있는 순례자들과 주방에서 준비하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우리도 주방에 들어가 간단하게 준비해서 식당에 앉아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하며 조용히 식사했다.


까미노를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혼자 나 둘이 걷는 사람들보다는 여러 명의 무리를 이룬 순례자팀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래서 개인끼리의 호기심이나 인사보다는 자신들의 무리에 집중하다 보니 더욱더 우리는 함께 어울리게 되는 사람들이 없다.


앞으로 210km만 걸으면 산티아고 꼼뽀스뗄라에 도착하게 되니 여기서부터는 순례자들이 더 많아진다. 100km 이상 걸으면 순례자 증명서를 발급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우 2년의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가을이라 봄에 왔을 때 보다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이 훨씬 많을 뿐인데 사뭇 2년 전과 다른 느낌이다.


주방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의 태도나 저녁식사가 모두 끝났어야 할 늦은 시간까지도 음료나 술을 마시며 시끌벅적하게 여럿이 웃고 떠드는 소리까지 모두 생경하다. 10시 전에 순례자들은 모두 침대에 누워 잘 준비를 하고 알베르게의 전등도 꺼지는데 오늘은 10시가 되도록 밖에서 웃으며 큰소리로 얘기하는 소리가 방까지 다 들리고 숙소의 전등도 꺼지지 않고 있다.


장소는 같아도 사람과 시간이 다르면 모든 게 이렇게 다르다는 걸 다시 깨달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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