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쉬고 나면 다시 출발을

(아름답고 선명한 까미노 화살표)

by 구슬 옥

9월 26일 뜨리아 가스 떼야(Triacastela) 22km

아침에 주방에서 간단한 것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고 길을 나섰다. 아침에는 다소 날씨가 쌀쌀해서 나는 방수 잠바에 달린 모자까지 쓰고 코까지 오르는 얇은 바람막이 두건을 두른 채 산으로 오르는 짧은 오르막길로 걸어갔다.


여기에서도 두 가지의 까미노 표시가 있는데, 알베르게 밑으로 이어지는, 마을 출구를 따라 내려와 차도 옆으로 나란히 걸어 내려가는 길이다.


안내책에서는 비가 많이 올 때는 여기로 가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바람만 있을 뿐 비가 오지 않아 쾌적하게 산길로 걸었다. 소나무 숲으로 이어진 길을 지나 내리막을 내려가니 차도 옆으로 Bar 가 보이고 주택이 근처에 드문드문 있는 작은 마을이다.


지난번에는 차도 옆길을 걷다가, 세찬 바람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불안한 마음에, 이 bar에 들어와 커피를 마시며 택시를 부르고 사리아 입구까지 타고 갔었다. 다행히 비가 잦아들어 까미노 표시가 있는 곳에 내려달라고 해서 거기서부터 비는 조금씩 오지만 잘 걸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 걸어가는 길도 처음 걷는 길이라 다소 호기심이 생긴다.


작은 마을을 지나서 나무가 터널처럼 어우러져 우거진 산길을 걸었다. 산 로께(San Roque) 언덕의 정상에 들어서니 순례자의 동상이 보인다. 돌로 밑단을 쌓고 그 위에 동상이 있어 더욱 커 보였다.


바람에 모자가 날아갈까 한 손으로 머리의 모자를 누르고, 지팡이를 짚고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는지, 잠시 바람을 맞으며 어딘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니, 올라오는 아침 해와 함께 멋진 풍경을 선물한다.

20170926_084143.jpg 떠오르는 아침 해와 산 로께(San Roque) 언덕의 순례자 동상이 보여 주는 멋진 풍광

아마 비바람이 몰아쳤던 2년 전에 이 길을 지났다면 저 순례자 동상이 자신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오늘은 날씨도 좋고 바람도 그다지 세지 않아 깊은 공감은 느낄 수 없지만 바람을 맞으며 계속 걸어야 하는 순례자의 마음은 함께 느껴지고 전달되었다.


맞은편 도로의 까미노 표시를 따라 언덕을 내려가니 꼰대사(Condesa) 마을로 이어지고, 산 후안 교구 성당의 돌담에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까미노 화살표는 우리의 길을 밝혀준다.

20170926_091220.jpg 산 후안 성당-돌담의 선명한 까미노 표시가 마음을 울린다

담 위로 보이는 성당의 종탑 모습은 오 세 브레이로의 레알 성당과 같아 보인다. 산 후안 성당도 아마 레알 성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것 같다. 성당 뒷담으로 이어져 성당은 들어가 보지 못하고 계속 마을을 지나 다시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작은 마을 빠도르넬로(padornelo)의 깔끔한 bar가 보인다.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마을 사람들이 여유롭고 행복해 보인다. 주인 옆에서 충직하게 앉아 기다리는 큰 개의 모습도 좋아 보였다. 가게 앞에서 보는 주위의 산과 나무들의 풍경이 햇살에 아름답다.


우리도 음료를 마시며 쉬다가 다소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오니 뽀이오(Poio) 언덕 정상이다. 조금 전 bar앞에서 보았던 풍경보다 더 탁 트인 아름다운 풍경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뽀이오 언덕에서 내려와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는 해발 1300미터의 고원지대를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면서 1시간을 걸어가니 또 마을로 들어서게 되었다.


걷다 보니 한 무리의 소들이 줄을 지어 우리 앞으로 걸어와, 옆으로 비껴 서서 소들을 먼저 지나게 하면서, 푸른 풀밭에서 한낮에 풀을 뜯으며 햇살을 즐기는 소들의 모습에 윤기가 흐름을 느낀다. 이곳은 소들도 행복하겠다.


폰 프리아(Fonfria) 마을을 지나 걸으니 조금 가파른 내리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멀리 아름다운 산과 등성이의 밭들을 보면서 한참을 내려오니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주택이 거의 없는 아름다운 숲 속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짚으로 지붕을 올리고 나무로 지어진 오레오(Horreos) 앞에 아주머니 한 분이 앉아서 일을 하고 계신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제 오 세 브레이로 마을로 오르는 길을 지날 때도 오레오를 보았는데 그게 뭘까 궁금해 안내책을 찾아보니 갈리시아 지방에서 추수한 농작물을 습기와 벌레를 피해 보관하기 위해 만든 작은 구조물이라고 쓰여있었다.

20170926_135913.jpg 피요 발(Fillobal) 작은 마을의 전통 구조물 오레오

계속된 숲길을 시원하게 걷다가 도로로 길이 이어지고 다시 도로를 건너가니, 나무 사이로 돌담이 이어지는 오솔길을 걷게 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사방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마을이 보인다.


그곳으로 내려가는 길에 밤나무와 참나무에서 떨어진 밤과 도토리가 길에 깔려있어 딛고 걷기가 아깝다.

오래된 나무 밑동의 기괴하게 생긴 모습도 신기하게 바라보며 부지런히 마을을 향해 내려갔다.

20170926_150400.jpg 오늘의 목적지 뜨리아 가스 떼야 마을이 보인다

마을 초입에 새로 지은 건물에 알베르게 표시가 있어 들어갔다. 사립 알베르게인데 굉장히 현대적인 건물이고 깔끔하다. 여러 층으로 되어있어 묵는 사람들도 많아 보이지만 2인실로 나뉘어 있어서 조용하다.


우리는 침대 정리하고 씻고 빨래해 널어놓고 조금 쉬다가, 동네로 나가 이른 저녁을 사 먹고 내일 걸을 때 필요한 물과 간식을 사 갖고 알베르게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미국에서 30년 이상 살고 있다 는 교포를 만났다.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레온부터 산티아고까지 가려고 걷고 있다고 했다.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준비해서 일찍 출발한다고 한다. 하루에 30km 이상 걸어야 된다고 하는데 대단해 보였다. 처음 걷는 길이다 보니 모든 것이 신기하고 흥분되는 듯했다.


우리도 2년 전 처음 산티아고를 걸을 때는 힘들지만 뭔가 벅차고 신나서 흥분되어 있었고 우리가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렇게 보였다. 계속 새로운 길을 걷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걸을 때와 쉴 때, 외국인 순례자뿐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되니 뭐랄까 군중심리? 아니 그건 아닌데 표현하기 어려운 공감의 감정들로 인해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금방 가까운 사이처럼 친근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흥분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남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신이 나 있지만 나는 그냥 잔잔한 감정으로 까미노를 걷고 있다. 그때보단 두려움이 많이 가신 탓일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작은 마을에 쉬느라고 한국인들을 거의 만나지 못하고 외국인 순례자들과 몇 가지 틀에 박힌 인사를 주고받을 뿐 짧은 영어로 더 대화를 하자고 할까 두려워 얼른 자리를 뜨느라 그런 걸까....


그분들은 영어도 매우 빠르게 잘 말해서 오히려 유럽인들이 하는 영어보다 알아듣기 힘들 정도인데 웃으면서 에피소드 하나를 말했다. 알베르게에서 외국인 순례자들 중 몇몇이 한국인들에 대해 뒷담화 하는 걸 우연히 듣고 있다가 까미노에서 만난 외국인과 영어로 인사하며 대화를 하게 되자 옆에서 얘기하던 외국인들이 놀란 눈으로 일어나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당황했을 그 외국인들을 생각하며 한참을 웃었다. 어딘가에서 만났던 한국인 순례자에게 좋지 않은 기억을 가졌던 사람들이 하는 얘기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임금님도 안 볼 때는 흉을 본다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누구나 다른 이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국인 앞에서 못 들을 거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말하는 건 서툴러도 듣는 건 잘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으니 특별히 조심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을 워낙 많이 까미노에서 보게 되니, 그것을 시기하는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좋아하지 않는 외국인 순례자들이 종종 있음을 어찌하랴.


나는 오랜만에 우리말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 조금 흥분해서 라바날에서 만났던 신부님께서 해주신 말씀 " 까미노가 끝나고 삶의 자리로 갔을 때 진짜 까미노 길이 거기 있다"는 얘기도 전해주었다. 그분들도 라바날에서 신부님을 만났다고 얘기하면서 함께 공감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길을 잃지 않고 내 삶의 까미노를 잘 걷기를. 힘들면 잠시 쉬면서 신발도 벗어놓고, 양말도 벗고 다리든 발이든 주무르고 다시 신고 출발하듯이, 삶의 까미노에서도 힘들 땐 잠시 메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해보는 것도 좋으리.


잊지 말 것은 쉬고 나면 다시 출발한다는 것이다. 산티아고를 향해 가듯 내 인생의 산티아고를 길 잃지 않고 다시 찾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방으로 먼저 들어간다고 일어서면서, 아침에 일찍 출발해서 못 보고 갈지도 모른다고 인사하던 미국 교포 헬레나를 일어나 안아주고 잘 걸으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엉겁결에 앉아서 고개 끄덕이며 미소로 인사했었다.


보내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에 나를 책망해 본다. 하루에 우리보다 빠르게 많이 걷는 그 부부를 까미노를 걷는 동안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터이기에. 헬레나 자매님 건강하게 잘 걷고 까미노의 좋은 추억들을 간직하고 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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