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골라인을 앞에 둔 선수처럼

(한없는 고요 속에)

by 구슬 옥

10월 3일 산티아고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 20.5km

설레는 마음으로 마을을 벗어나 화살표를 따라 까미노 길에 들어섰다. 스치는 순례자들과 '부엔 까미노' 하며 인사를 하는데, 다른 날과는 다르게 까미노를 걷는 순례자들 모두가, 오늘은 조금 인사를 나누는 소리나 표정이 크고 환하다.


그들 대부분이 가벼운 걸음으로 싱글거리며 까미노를 걷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오늘, 드디어 순례길의 최종 목적지가 되는 산티아고 시내로 들어가기 때문 일 것이다.


넓은 녹지를 지나고 도로를 넘어 나무들 사이로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을 오르니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이 보였다. 국제공항이 가까운 듯했다. 비행기를 바라보다 다시 숲길을 걷고 잠시 도로와 나란히 걷다가, 나무들 사이로 길게 이어진 오르막길이 언덕까지 이어지고


다시 내리막으로, 또 오르막으로 이어지는 산길과 고속도로 옆을 걸어, 아담한 라바 꼬야 마을의 작은 Bar에 들어갔다. 커피와 빵을 주문해 먹으며 옆자리에 앉은 첫인상이 수수한 일본인 아저씨와 서툰 영어로 인사했다.


나이가 얼핏 우리와 비슷할 것 같은 일본인 아저씨는 영어도 우리만큼이나 서툴다 보니 서로 대화가 좀처럼 길게 이어지지 않는다. 우습게도 둘 중 한쪽이라도 잘하면 말은 서툴러도 듣고 이해는 하는데, 우리는 양쪽 모두 말하기가 서투니 서로 듣는 것도 어려웠다.


그래도 통성명을 하고 이런저런 노력을 통해 오늘 산티아고에 들어가는 기쁨을 나누었다. 그는 어제 만났던 한국인들과 산티아고 대학 근처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오후에 만나기로 했다는 얘기도 했다. 까미노를 걷는 동안 한국음식을 파는 식당이 있으면 좋을 텐데 라는 생각을 나도 했었는데 도착지점인 산티아고에 이미 있다고 하니 반가웠다.


마을을 나와 완만한 언덕들을 오르고 내리며 떡갈나무를 따라 걷다가 리곤데 마을에서 인사했던 미국에서 순례 오신 헬레나 부부를 만났다. 비슷한 연령대인 그분들을 여기서 만나니 너무 반갑다. 단지 까미노 길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인데 절친을 만난 듯 너무 기쁘다.


언제나 활발하게 웃는 헬레나 부부와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일행들이 있는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어졌다. 아마도 이틀 동안 불편했던 미국 단체 순례자들도 이렇게 개인으로 만났을 때는 격의 없이 좋을 수도 있었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단체에서의 개인의 모습과 홀로일 때의 개인의 태도는 많이 다르다는 걸 새삼 또 알게 된다.


걷다 보니 저만치 고소(Gozo) 산이 보인다. 고소 산의 작은 언덕에 있는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방문 기념물을 보니 가슴이 뛴다. 2년 전에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식구들과 느꼈던 벅찬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몸이 먼저 아는지 걷는 속도가 빨라졌다. 숨을 헐떡이며 언덕 위에 올라 탄성을 터트렸다. 멀리 산티아고 시내가 보이고 아스라이 산티아고 대성당의 탑이 보인다고 남편이 손을 들어 가리킨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심장이 뛴다. 골라인을 앞에 두고 달려가는 달리기 선수처럼.

산티아고 시내를 바라보며 고소 산에서 환호한다

그러나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길고 길었다. 포장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몬떼 데 고소의 거대한 알베르게 단지가 보인다. 산티아고에 들어가기 전, 여기서 묵으며 함께하는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 산티아고 대성당의 정오 미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머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산티아고 꼼뽀스뗄라 대성당 앞으로 가고 싶어, 계단을 내려가 까미노 표시를 따라 걸었다. 그런데 까미노 표시가 2년 전에 직진으로 들어갔던 길이 아닌 우회도로로 표시가 바뀌어, 돌고 돌아 복잡한 도로를 건너면서 갑자기 배가 아프고 화장실이 급해졌다.


까미노를 걷는 동안 마을이 없으면 화장실을 들릴 수가 없어 매우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가 많다. 길을 걷다 보면 저쪽 숲길에서 급한 볼일을 처리하고 나오는 사람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성모님께 도와주시길 청했다. 마을에 도달했을 때 화장실을 갈 수 있도록.


다행히 걸으면서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마을에 거의 도달해서 신호가 오고 온몸과 정신을 집중해서 빠르게 걸어가 무사히 해결을 하곤 했었다. 이번에도 다행히 호텔이 앞에 보여서 부지런히 걸어 들어가 편안하고 깨끗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호텔을 나와 까미노 표시를 찾을 수 없었지만, 지나가는 순례자들의 모습을 보고 길을 찾아 산티아고 꼼뽀스뗄라 글자판이 있는 공원에 도착했다. 어린아이들처럼 서로 기뻐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산티아고 입구의 공원에서

그리고도 한참을, 현대적인 거리가 이어지는 복잡한 도심을 걸었다. 오늘 이곳에 도착한 순례자들 중, 여기 도심의 깨끗한 사립 알베르게 1인실에 들어가 조용히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순례자들도 많다고 들었다.


어제 남편과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던 이태리 청년도, 오늘 시내 초입의 알베르게 1인실에 머물 것이라고 하면서 남편에게도 추천해 준 알베르게가 있었다.


복잡한 도로를 몇 번씩 건너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순례자들의 뒤를 따라, 산티아고 대 성당으로 이어지는 좁고 오래된 길을 걸어, 유서 깊어 보이는 건물들과 성당들을 지나 산티아고 대 성당 앞에 도착했다.


우리는 산티아고 대성당 앞 광장에서 두 손을 치켜들고 환호했고, 서로 부둥켜안고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도착점을 알리는 광장 바닥의 조개 문양을 짚어보기도 하고, 광장 한쪽에 앉아 말없이 아직도 수리 중인 대성당의 외관을 바라보고, 계속 광장으로 들어오는 순례자들의 벅찬 환호성을 미소를 띠며 들었다.


지난번에 이곳을 도착했을 때는, 우리 가족과 마지막 코스를 같이 걸어온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 중인 여학생과, 산티아고의 오래된 알베르게를 먼저 찾아 들어갔었다.


그리고 까미노 마을에서 하던 대로 내가 갖고 있는, 내게 묻어있는 모든 것들을 깨끗이 씻어내듯이 샤워하고 먼지 묻은 옷과 침낭과 배낭까지도 세탁해 건조했었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 나름의 의식 같은 걸로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는 복잡한 산티아고 시내의 길을, 이리저리 찾아 헤매면서 산티아고 대 성당에 들어갔었다.


대성당 제대 뒤에 금빛으로 칠해진 야고보 성인의 성상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줄을 서서 계단을 올라가길래 우리 가족들도 엉겁결에 줄 서서 올라가, 모두가 하는 것처럼 성상의 목을 뒤에서 껴안고 지하로 내려갔었다. 조금은 우리에게 낯선 의식이었고 그날 하루 종일 들뜬 채 길도 여러 번 헤매며 다녔던 기억이 났다.


오늘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진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산티아고 대성당 앞에 도착하고 싶었고 환호하고 싶었다. 배낭을 멘 채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안내하시는 분이 제지를 했다. 스틱과 배낭을 다른 데에 맡기고 들어오라는 것 같았다.


지난번에는 알베르게에 미리 들어갔었던 덕에 배낭이 없어 몰랐었다. 대성당 옆 기념품 가게에 2유로씩 내고 배낭을 맡기고,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생각지도 않게 다시 이곳에 오도록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했다.


길을 걸으며 무엇을 깨달았어야 하는지, 내가 버리고자 했던 것들을 제대로 다 버리고 왔는지 되돌아보았지만 잘 모르겠다. 그저 한없는 고요 속에 가만히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이 바쁜 남편이 기다리는 것을 느껴 일어나 성당 지하로 내려가니, 산티아고 성인과 그의 두 제자의 유해가 들어있는, 순은으로 입혀서 조각한 함이 있었다.


지난번에는 사람들에 밀려서 내려오고 또 밀려서 바삐 지나야 해서 잠깐이라도 머물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나를 재촉하는 사람이 아직 없어 잠깐 머물다 다른 순례자들을 위해 조용히 나왔다.

산티아고 대성당 지하 묘소의 야고보 성인의 유골함

기억을 더듬어 지난번 묵었던, 중세에는 수도원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순례자들을 위한 쉼터가 된 고풍스러운 알베르게로 다시 찾아가 접수하고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이틀을 머물 수 있다.


800km를 걸어온 순례자들이 충분히 쉬고 다음 여정을 시작할 수 있도록 1인실도 많고 2인실 다인실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 규모가 큰 알베르게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몰라서 다인실에 들었고 1층 침대로만 되어있는 것에 감동하고 만족해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1인실에 머무는 걸 보고 많이 부러웠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1인실은 못 들어가고 남편이 선택하는 데로 2인실에 들었다. 샤워하고 땀과 먼지로 얼룩진 옷들과 침낭까지도 세탁기를 이용해 빨고 건조기에 건조해놓고, 간단히 장을 봐 와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는 오래된 수도원을 개조한 알베르게 앞에서 붉게 물들며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서로 감격에 겨워 말을 아끼고 오래도록 서있었다. 산티아고 대학 근처에 있다는 한국식당에 가면 오늘 도착한 한국인 순례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텐데 가지 않았다. 그냥 오늘은 다른 사람들과 시끌벅적 얘기하는 것보다는 그저 이렇게 노을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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