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늘도 막걸리 몇 잔을 먹어 기분이 좋은지 내게 전화를 했다.
"잘 지내지? 나는 오늘 일이 들어와서 사무실 나왔다가 막걸리 먹고 있다. 저녁은 먹었니?"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으로 바둑을 두며 한창 집중하고 있는 나에게 하필이면 이때 걸려온 전화는 불편했다.
" 아 예 예 잘 지내고 있어요. 저녁은 조금 있다가 먹으려고요"
화면에 집중하고 있느라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게 건성으로 대답하는 나의 말에도 술 몇 잔에 기분 좋은 그는 다시
"아이들도 잘 지내지? 00도 많이 컸지?"
결혼한 지 7년 여가 되어가는 내 아들의 안부와 손자의 안부까지 계속 큰소리로 묻고 있다.
언제나 전화할 때마다 물어보는
"그 녀석 많이 컸겠다 보고 싶네"하는 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나는 이번 바둑판에서 질 수가 없어 무슨 소리를 계속하시는지 들리지 않는다.
묻는 말에 대답이 거의 없는 것에 실망을 한 건지 아니면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자신만의 독백인지 그는 잘 지내라는 말을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이미 중요한 순간을 놓쳐 회복을 못한 채 바둑은 패했다. 왜 꼭 중요한 때에 전화는 오는지 모르겠다고 툴툴대는 내게 아내가 딱한 듯 한마디 거든다.
"그때는 전화를 받지 않으면 되지요. 끝나고 전화하고. "
그래도 곁에서 울리며 전화한 사람이 누군지 이름이 뜨면 그 와중에도 받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큰 형님이니까.
형제가 여럿인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대신 가장노릇을 했다. 좋은 머리에 부지런하고 리더십이 있는 그였지만 등록금 하려고 키우던 돼지가 상하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생기면서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면사무소의 급사로 들어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었다.
해방둥이 인 그는 어른들의 사랑을 많이 받고 유아기를 행복하게 보냈다고 한다. 어머니가 가끔씩 옛날을 회상하며 얘기를 하실 때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수십 번은 하신 것 같아 마치 그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그가 집안의 사랑을 받고 귀함을 받은 시간은 소년기까지 일 것이다. 그 후로는 가장이 되어 어머니를 도와 돈을 벌어야 했으니.
어머니가 내 위로 네 명의 자식을 낳고 나를 낳고 그리고 내 밑으로 동생들이 세 명이 있으니 그 시절 그 어려운 시절에 참으로 그는 어머니의 든든한 대들보였으리라.
나는 그와 11살 차이가 난다. 그가 20대 청년일 때 군대를 가서 월남전에 파병을 갔다 돌아왔을 때 나는 그가 준 돈으로 중학교를 입학했다. 그 뒤로 그는 나의 학비며 동생들의 학비를 대주는 키다리 아저씨였다.
나중에는 나도 그를 도와 동생들의 학비를 함께 분담했지만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할 때까지 그의 집에서 동생들과 어머니와 어린 조카들과 함께 살았다. 요즘에도 그런 집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 옹기종기 어렵고 힘들지만 가끔 행복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는 나에게 단순한 형님이 아니었다. 바닷가 마을에서 잘 되던 생선장사가 장마로 크게 손해를 입자, 그것을 회복하지 못한 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아버지 대신 나와 나머지 동생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대부였다.
군대를 제대한 뒤 그는 서울에 올라와 일을 시작했고 인쇄와 관련된 일을 하면서 조금씩 돈을 모으고 결혼 후에는 탄탄한 자영업자로서 충무로에 작은 사무실을 임대하여 쓰면서 해마다 성장했다.
그의 성장과 더불어 우리 형제들은 모두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녔고 동생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쯤에는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와 가내수공업을 하듯 집에서 동생들이 주말이나 방과 후에 일을 도와주곤 했었다.
그때는 나라 경제도 계속 성장할 때라 그런지 그의 사업은 매년 거래처가 늘고 매출이 늘었고 풍요로웠다. 그의 아이들은 사립초등학교를 다녔고 두 남동생들도 대학에 다녔으니 그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본인은 진학하지 못했지만 동생들은 대학까지 다니고 있어 한편으로는 부럽고 자신도 다시 공부를 하고 싶기도 했을 텐데 그는 역시 난사람이었는지 달랐다.
'나는 못 배웠어도 동생들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척척 들어가니 나는 너무 좋다. 나는 너네들만 보면 배가 부르다.' 술 한잔 걸치면 흥겨움에 눈물도 흘리면서 노상 그는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처음 작은 단칸방에서 시작해 두 칸의 넓은 전세방으로 그리고 방세칸이 있는 빌라단지에 들어가고 내가 결혼을 한 후에는 큰 이층 주택을 사서 이사했으니 그의 사오십대는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나는 그의 전화를 너무 데면데면하게 받은 것 같아 다시 그에게 전화를 했다.
"형님, 지금 어디세요? 아까는 제가 다른 일을 하고 있느라 전화를 제대로 받을 수 없었어요 죄송해요."
"아~ 그랬어? 괜찮아. 나는 막걸리 한 병 먹고 지금 전철 타고 집에 가는 중이다. 별일 없지?"
술 한잔에 적당히 기분 좋은 그의 목소리는 전철의 소음과 함께 들려왔다. 오늘은 술을 조금만 드시고 일찍 집에 가시는 걸 보니 내 마음도 가벼웠다.
"네~ 저희는 별일 없이 잘 있어요. 형님도 건강하시죠? 이제 일은 그만하세요. 형님 연세가 80이 내일모레인데 아직까지 일을 하시려고 하세요? 동생인 저도 이렇게 놀고 있는데."
"아~가끔씩 일이 들어오면 하는 거야.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고. 어쩌다 한 두 번씩 일하면 용돈도 생기고 즐겁고 힘이 나니 나는 이게 좋다. 걱정하지 마~끊자. 잘 있어."
전철 안이라서 전화받기가 어려우신지 얼른 통화는 끝났다. 그의 나이 78세.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사무실을 정리한 것이 몇 해 전이다.
그것도 형수가 힘드시니 그만하시라고 여러 번 권하고, 본인도 체력이 많이 떨어져 결국 사무실을 정리했지만 가끔씩 옛날 거래처에서 연락이 오면 같이 사무실을 쓰던 젊은 사장의 사무실을 이용해 일을 처리하고 기분 좋게 막걸리 한 두 병 마시고 들어가신다.
그는 젊은 날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취미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유일하게 거래처 사람들과의 회식이나 아니면 정기 적으로 하는 시골의 초등학교 동창들 계모임에 참석하고, 월남 다녀온 전우회의 모임 등 사회생활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과의 여러 모임에 참석해 술 한잔하고 흥겹게 집에 오는 게 다였다.
나는 취미로 바둑도 두고, 요즘에는 은퇴하고 동기들과 만나 당구도 배워 치면서 지내는데 그는 도통 그런데는 취미가 없다고 했다.
젊은 시절에는 가족들을 돌보고 공부시키는 게 그의 최고의 낙이었고, 차례로 큰 동생들을 결혼시키고, 제수씨들과 매재들까지 식구가 늘어나면서 대식구의 대식구가 되는 것을 그는 너무도 흐뭇해했다.
어머니보다도 더 눈시울을 적시며 감격스러워했었다. 그는 자신을 그저 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서가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는 대부로서의 삶에 더 열중했었던 것 같다.
거기에 더하여 아버님께 물려받은 술 잘 먹는 체질이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술 먹는 모습을 닮았다. 그는 왜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가난도 어느 정도 물러가고 그를 위해 뭔가를 준비했어도 되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