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예쁜 맏형님

(당차고 그러나 여린)

by 구슬 옥

내가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그와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그의 집에 인사하러 갔을 때였다. 아마도 꽃샘바람이 피부를 자극하는 지금으로부터 35년 전 3월 어느 날로 기억된다.


그를 따라 낯선 동네의 도로를 이리저리 지나며 아담한 빌라 단지의 한 집으로 들어갔다. 케이크를 들고 들어갔던 것 같기도 한데 지금은 모르겠다. 단지 기억되는 것은 작은 키에 상꺼풀이 있는 눈에 속눈썹이 긴듯한 갸름하고 예쁜 얼굴의 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어서 와요~날씨가 쌀쌀하지요?' 하면서 현관에서 반갑게 맞아주었던 이미지만 생각난다.


거실에는 시골 할머니처럼 머리를 쪽진 그의 어머니가 살짝 웃음을 띠며 바라보고 계셨고,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똘똘한 눈으로 나를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아직 그의 큰 형님이 퇴근하지 않으셨는지 그는 나를 동생들과 함께 지내는 작은 방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했다. 5단 서랍장 위로 요와 이불이 잘 개켜져 포개져 있었고 벽에 박은 옷걸이에 후줄근한 옷들이 몇 개 걸려있는 게 전부인 직사각형의 작은 방이었다.


낯선 방에 나를 혼자 두기가 그랬는지 아니면 호기심 많은 어린 조카가 심심했는지 블록놀이 장난감을 갖고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는 멋쩍게 방 안을 둘러보고 앉아있는 내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블록놀이를 하자고 하면서 블록들을 한쪽으로 쏟아놓는다.


그때 친구처럼 나와 시간을 보내준 눈망울이 귀엽고 순수한 어린 조카는 처음으로 인사를 드려야 하는 낯선이 들 앞에서 나의 긴장감을 풀어주고 편하게 해 주었다.


그 후에 그의 큰 형님이 퇴근해 오시고 하면서 어떻게 시간이 지나고 무슨 말을 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인사를 드리고 다과상을 앞에 놓고 흡족한 얼굴로 여러 가지 얘기를 하시던 기억이 난다. 그의 어머니 역시 아들의 선택에 만족한 지 연신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셔서 내 신경의 끈들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을 것이다.


그녀도 나를 좋게 보았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30이 넘어가는 시동생이 결혼하겠다고 소개하는 사람이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였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큰 형님과 큰형수는 차례로 결혼하게 되는 동생들을 어머니와 같이 선을 보고 흡족해하며 결혼식에 관한 여러 가지 뒤처리를 해주었다.


그녀는 역시 8남매의 큰며느리답게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나와는 7살 정도 차이가 나지만 30대 중후반의, 삼 남매의 엄마로서 풍기는 이미지는 시어머니 될 분 보다 더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내가 그와 결혼하고 바로 임신을 하게 되어 그다음 해인 3월에 큰아이를 낳고 집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을 때 그녀는 집으로 나를 보러 왔다. 결혼하고 맞는 첫 생일이니 축하한다고 하시며 란제리 속옷과 한국도자기에서 만든 하얀 접시들을 크기별로 몇 개씩 사다 주었다.


내가 결혼하면서 그릇을 큰 세트로 사지 않고 필요한 것만 몇 개씩 사다 보니 집들이를 할 때 조금 접시들이 부족했었던 걸 기억하고 잊지 않고 선물을 해준 것 같다. 전혀 생각지 못하게 큰동서에게 생일선물을 받아 감사하고 미안했다. 아직은 어렵기만 한 그녀지만 여자형제가 없는 큰동서는 나에게 늘 살갑게 대해주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골에서 계속 사시다가 올라와 세상 변화에 무디고 경제력이 없는 시어머니가 그녀의 첫 생일을 아마도 그냥 흘려보냈던 아쉬웠던 기억이, 손윗동서로서 시어머니를 대신해 나를 챙겨주고 싶었던 아릿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같은 동네로 내가 이사를 하고 더 자주 아이를 업고 그녀의 집을 가면서 우리는 스스럼없는 동서가 되고 그녀는 내게 든든한 형님이 되었다. 명절 때면 집이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이지만 그녀의 집에서 며칠씩 지내기도 하고 명절 전날에는 준비를 마치고 그녀와 화투놀이를 즐겨하는 둘째 동서와 셋이서 눈썹이 희게 되는 걸 막는다고 밤을 넘기며 놀다가 새벽에 정신없이 일어나기도 하면서 더욱 정이 들었다.


그와 나는 결혼 전에 크게 모은 돈이 없었지만 그의 직장에서 직원복지로 대출해 준 전세금으로 신혼집을 꾸밀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는 곳을 다녔던 터라(그다음 해부터 노조가 생기고 기혼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외벌이 월급쟁이로 그리 풍족하지 않은 출발이었다. 작은 월급에서 재형적금을 붓고 나머지를 갖고 생활하던 때라 빠듯한 살림이었다.


설상으로 그는 결혼 전부터 학비를 대주던 밑에 남동생의 학비를 결혼 후에도 2년 반을 대줘야 한다고 미리 내게 말을 했었고, 동생의 학비니 당연히 해주어야 한다고 나도 동의했었기에, 3달에 한번 나오는 보너스를 쓰지 못하고 모아서 전부 등록금으로 주어야 하는 때라 더욱 여유가 없었다.


그런 사정을 알고 있는 그녀는 명절이나 집안 제사 때에 특별히 내게 요구하는 것이 없었고, 아직 물정 모르는 나도 일찍 큰집에 가서 그녀를 도와 전을 부치고 설거지를 하는 등 함께 이야기하며 일하는 것만을 즐거워했었다.


가까이 살다 보니 알게 모르게 그녀의 도움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조카들이 갖고 놀던 레고세트나 동화책등을 물려받기도 했고, 이층의 넓은 주택에 사는 그녀의 집에 가면 나무로 잘 길들여진 내부계단을 놀이터 삼아 오르내리며 노는 아이 때문에 그녀가 친구들을 만나러 외출했을 때도 어머니가 계셔서 자주 갔었다.


여름에는 가끔 큰집의 차를 타고 근교로 아이들과 물놀이도 가고, 가족들 모두 시골로 성묘 갔다가 내장산이며 선운사며 여러 곳도 함께 여행하고 돌아오곤 했었다. 그때에는 큰집이 한창 사업이 잘되고 있을 때라 거의 모든 비용을 그의 큰형이 쓸 때였다. 늘 기분 좋게 쓰면서 동생들이나 조카들을 챙겨주시곤 했었다.


다행히 시간은 빨리 흘러서 시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이 되어 결혼을 하고, 막내시동생까지 대학을 마치고 직장에 다니며 일찍 결혼을 하게 되어 그녀는 4명의 동서를 거느려야 하는 명실상부한 대가족의 맏며느리로서의 큰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누나들과 누이 그리고 독수리 5형제가 모두 가정을 이루고 한창 살림을 키워나갈 때라 모이면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설날이면 차례를 지낸 후 모두 한복으로 갈아입고 어머니께 세배하고 나서, 형제들끼리 마주 세배하고 덕담을 나누며 조카들의 절을 받고 세뱃돈을 챙겨주는 화기애애하고 즐거운 시절이었다.


물론 그녀도 나와 같이 즐거운 시절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때때로 모이는 대가족의 먹거리를 준비하고, 썰물처럼 왔다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들을 치우며 정리하는 일이 나와 손아래 동서들이 함께 해놓고 갔어도 그녀만이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내 아이가 초등학교를 들어갔을 때 그녀의 큰딸은 대학을 들어갔고 큰아들 작은아들이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니 그녀에게 우리는 몰랐던 힘든 시간들이 아마 있었으리라. 가끔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맘이 상한 적도 있었고, 밖에서 술을 과하게 먹고 와 그녀를 힘들게 했을 남편 때문에도 홀로 외롭고 속상할 때가 많았으리라.


그때는 나도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녀만의 외로움을 알지 못했다. 나도 장손집안의 자녀라서 큰며느리의 노고가 얼마나 크고 힘든 것인가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속속들이 힘든 것을 내게 말하지 않는 그녀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못했다.


공부를 시켜주고 결혼을 시켜 모두 독립을 하면 그녀의 일이 끝날 것 같았지만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고 가끔씩 여기저기서 일이 터졌다. 어머니는 일이 난 자식을 애달아했고 한집에 살면서 그것을 보며 어쩔 수 없이 해결사로 또는 도우미로 나서야 하는 그녀는 조금씩 지쳤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아파트 청약이 당첨되어 그녀 가까이 살던 동네를 떠났던 터라 자주 그녀의 집을 드나드는 일이 줄었다. 가족 행사나 기일, 명절 때 외에는 일부러 그녀 집에 가는 횟수가 뜸했다. 한창 아이들에게 손이 가는 때이기도 하고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 비슷한 또래의 엄마들과 사귀게 되면서 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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