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마음

(시골에 집을 살까?)

by 구슬 옥

그녀의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게 되자 그녀도 남편의 은퇴 뒤를 생각했는지 살던 집을 정리하고 중구에서 동대문구의 한 동네로 다세대주택을 매입해서 이사했다. 집 앞에 주차할 공간도 있어 형제들이 방문하기가 수월해져서 모두들 좋아했다.


그곳으로 이사 간 후 얼마뒤 큰 딸의 혼사가 있었는데 문제는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물정에 어두운 나 때문에 집안에 파란이 일어난 것은 아닌지 되짚어보게 된다. 축의금을 얼마 해야 될지 아래 두 동서가 내게 물었다.


하필 그 당시에 나는 대출을 끼고 평수가 넓은 아파트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큰아들도 고등학생일 때라 여러 가지 지출이 많았었다. 더구나 평수가 넓어진 만큼 생활비도 늘어났고 친정조카도 같은 달에 결혼식을 하게 되어 축의금 고민을 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동서들이 알아서 하는 게 좋겠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정황들이 서로 다르니 각자 사정대로 축의금을 알아서 하면 좋겠다고 했지만, 두 동서는 그래도 서로 맞춰서 하는 게 좋겠다고 의논을 했다. 내가 영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면 첫 결혼이니 액수를 크게 하자고 하고 나는 정 안되면 조금 낮춰 넣으면 되었을 텐데 어리석게도 그런 생각을 못했다.


아니면 이웃 형님들께 조언을 구했으면 좋았으련만 내 형편만 생각하고 그녀가 기대한 액수보다 현저히 낮은 금액을 셋이서 똑같이 축의금으로 드렸었다. 집안행사가 계속 연이어 있을 예정이라 그것을 대비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녀의 마음에 금이 갔었던 것 같았다.


어차피 축의금이란 것이 주고받는 것이라 나는 자신의 형편에 맞게 인사를 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녀에게는 두 아들이 남아있으니 나중에 형편대로 더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 때문에 그녀가 그토록 서운해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형님이 형편을 아시니까 이해해 주시겠지 하면서.


그녀는 나름대로 시동생들이 좋은 회사들을 다니고 집들도 장만하고 했으니 이참에 집안 대소사에 그 정도는 할 줄 알겠지 하고 내심 기대가 있었나 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옛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닌 것인데...


그래도 카리스마 있는 그녀의 지도로 대가족의 여러 행사는 항상 즐겁고 유쾌했다. 시어머니의 생일도 형편에 따라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차려드리고 식구들을 초대했기 때문에, 조카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가 생겨 대가족의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것 또한 자랑이고 즐거움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는 이미 50대로 들어가 있었고, 갱년기도 시작되었다. 그녀의 어린 자녀들도 모두성장해 하나 둘 결혼하여 집을 떠났고, 집은 빈 둥지 증후군이 들어와 자리 잡으며 그녀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었다. 옛날 같으면 그냥 웃고 넘어갔을 일도 서운함이 마음 한편에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함께 사시는 시어머니는 힘든 시절을 살아온 분이라 가끔 내가

'형님이 갱년기라 조금 힘드신 것 같아 보여요' 하고 말을 하면

'아이고~갱년기가 뭐냐? 우리 때는 먹고사는 것이 힘들어서 그런 게 뭔지 모른다. 지금은 얼마나 좋은 세상이냐? 남편들이 돈 잘 벌어다 주고 자식들도 다 자라서 잘 사는데 무슨 걱정이야?'


하시며 말 자체를 이해 못 하는 옛날 분이었기에 그녀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누구보다도 의지하는 남편 역시 그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해 그녀가 서운하게 생각되는 일은 계속 생겨났다.


어머니가 시골 고향에 사는 시누이집을 가끔 오가면서 시골에 집을 하나 장만 하시면 좋겠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집안에서 진행되는 일들 중에 때로는 그녀만 모른 채 남편과 시어머니등 시집 식구들끼리 얘기를 맞추고, 일이 되고 나서야 그것의 전말을 듣게 되는 일이 가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었다.


아주버니는 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보니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어 소리 없이 일을 진행한 것인데 오히려 중요한 일을 그녀만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는 소외되고 따돌림당한 듯 서운했다고 한다. 이번에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가 먼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아마 시아버님 기일 제사를 마치고 식사 후에 과일을 먹으며 시작되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막내아들만 결혼시키면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늘 하셨으니 이참에 어머니 집을 시골에 장만해 드리고 살림살이도 마련해 드리자고 했다. 생활비는 다섯 아들이 똑같이 분담해서 보내드리면 좋겠다는 의견과 함께.


나도 어머니가 자주 시골에 가서 사시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라 좋다고 찬성했고 다른 동서들도 별다른 의견이 없었다.


물론 시골에 가서 혼자 사시기에는 어머니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았지만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이며 환갑이 가깝도록 사셨던 곳이고, 그때까지도 집안일을 잘하시고, 큰 딸 부부가 살고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생각들이었다.


그러나 시동생 둘과 그는 '어머니가 시골 가셔서 어떻게 사시겠어요? 안될 것 같은데..' 하면서 그들 셋이 이미 얘기가 있었는지 '셋째 형이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좋을 거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은 채.

마침 자식들의 얘기를 밖에서 듣고 계시는 어머니를 방으로 모셔서 어머니의 생각도 그러신 지를 여쭤보았다. 나는 어머니가 '시골 가서 살고 싶으니 집을 하나 준비하면 좋겠다.' 이러실 줄 알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가타부타 아무 말씀을 안 하셨다. 나도 어머니를 우리 집에서 모시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도 어머니는 한 달에 거의 한 번씩 우리 집에 오셔서 보름 가까이 지내다 가셨기 때문에 굳이 시골을 안 가시려면 지금처럼 그렇게 하시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결론 없이 일어나 뒤숭숭한 마음으로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오면서 실상 어머니에게 드릴 마땅한 방이 우리 집에는 없는 게 문제라는 생각을 했다.


평수는 커서 방이 4개라고 해도 거실만 크고 더구나 손님방으로 어머니가 묵고 가시는 방도 안방과 붙어있는 어둡고 작은 방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제일 가깝게 지내며 어머니의 속얘기도 많이 듣는 나였지만, 본격적으로 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나도 장손 집에서 자라면서 할머니와 어머니의 갈등도 보았고 작은아버지들이나 고모들로 집안이 늘 분주하고 조용하지 않았던 기억 때문이다.


친정어머니처럼 가깝게 지내며 여름휴가 때나, 며칠 씩 여행 갈 때는 어머니와 늘 함께 했었지만 매일의 생활을 집안에서 함께한다는 것은 두려웠다. 좋았던 관계만큼 실망도 클 수 있고, 기대도 많을 테니 말이다.


내 생각이 어제는 '아냐,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없어' 하다가도 오늘은 '그럼 어떻게 하나, 갱년기를 치르는 형님의 마음에 어머니는 떠난 것 같은데..' 하며 쉴 새 없이 이럴까 저럴까 머리만 굴리고 있을 때 소리 없이 일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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