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내 짐을 좀 나누자)

by 구슬 옥

진정되지 않는 눈물을 애써 닦으며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마음은 편해졌다. 띵하고 무거운 머리로 화장실을 들어가 거울을 보니 얼굴이, 눈두덩이가 울다가 잠을 잤는지 퉁퉁 부어있는 꼴이 참 가관이었다. 어제저녁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지? 나도 잘 가늠이 안된다.


친구들을 만나 늦은 점심을 먹으며 소주 몇 잔을 하고 집에 왔는데... 어제 따라 저녁 준비도 아직 안되었는데 일찍 집에 온 남편은 손을 씻고 나오며 나하고 잠깐 얘기를 하자고 했었다.


"여보, 어머니 문제 생각해 봤는데 그래도 여태껏 우리가 모셨는데 계속 우리가 모십시다. 아이들도 이제는 다 커서 손 갈 것도 없고 식구도 없는데."

"그럼, 어머니는 왜 시골에다가 집을 사고 싶어 하셨어?"

"아~ 그건 내가 어머니한테 여쭤보니까 우리가 시골에 성묘 가거나 할 때 편히 가서 지내다 오면 좋을 거 같아서 그러셨데. 어머니도 가끔씩 가서 계시다가 오기도 하시려고."


갑자기 낮에 먹은 소주 몇 잔의 취기가 확 얼굴로 올라오며 나를 충동질한다. "어머, 그럼 그날 그렇다고 말을 안 하셨어?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있으시면 우리한테 미리 의논하시고 집을 알아보셔야지. 어차피 당신이 못사실텐데."


"그거는 어머니가 조금 알아보고 나서 마땅한 게 있으면 천천히 얘기하려고 하셨데. 괜히 이모가 쓸데없는 말을 하셔서 당신이 오해했지."

"당신이 조금 힘들더라도 이제까지 우리가 했는데 어머니가 연세도 있고, 또 혼자 가고 싶어 하시는 것도 아니니 그때 얘기는 없던 일로 잊어버립시다. 그리고 어머니한테도 시골집 알아보시지 말라고 내가 말씀드렸어요."

"어머, 웃기네. 왜 당신 마음대로 그렇게 말씀드려? "나는 그렇게는 못해." 어디서 뭔가가 내 마음으로 들어와 나를 흔드는 건지, 아니면 잘 못하는 술 몇 잔이 이제 제대로 취기를 발휘하는 건지 나는 제어되지 않는 말을 그에게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막내만 대학 졸업하고 결혼하면 다시 시골 가서 살고 싶다고 몇 번을 말했어? 거짓말 더하면 100번은 될 거야. 막내가 결혼 한지가 지금 몇 년이에요? 그런데 시골에 집사서 살림준비도 해드리고 생활비도 드린다는데 왜 안 가신데요?

그리고 셋째 서방님은 결혼하면 어머니 모시고 산다고 나한테 대놓고 말했었는데 지금 결혼한 지 15년이 더 넘어가는데도 왜 어머니 안 모셔? 이제 생각하니 힘든가?"


갑자기 속상하고 억울한 생각에 눈물이 났다. 내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나도 힘들었는데. 시어머니며 시동생, 시누이까지 함께 살면서 애쓴 내 모든 시간들이 다 헛것인 것 같은 헛헛한 마음이 인다. 물론 시어머니가 좋은 분인 줄은 나도 안다.


살림에 부족한 나를 대신해 때때로 김치며 마른반찬등을 미리미리 해놓으시고 내가 집안일을 다 못하고 약속 때문에 나가면 빨래며 청소도 다 해놓으시고, 늦으면 미리 식사준비를 해서 아이들 밥도 챙겨주셔서 밖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바쁘게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니 나도 고마웠다. 그러나 나도 내 자식들과 우리끼리 재미있게 한 번 살고 싶다. 그런 걸 원하면 나는 안되나?


돌아가면서 시어머니 생일상을 차릴 때 동서들 집에 가면 뭔가 아기자기한 자기들만의 분위기가 있다. 얽매여있지 않은. 이제는 다들 웬만큼 살지들 않는가? 이제 나에게 지웠던 이 짐을 조금 나누어져도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어머니를 모시기 어려우면 어머니의 소원대로 시골에 살림집을 마련해 드리고 생활비도 같이 보내드리면 어머니도 내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사실텐데? 시골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그게 뭔데?


부글부글하던 내 생각이 튀어나오며 소리가 좀 컸었나 보다. 갑자기 위층에 계시던 어머니가 내려오시며 뭐라고 한마디 하시는데 거기서 내가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셋째네가 어머니를 모시러 오고, 큰애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은 끝났다.


큰 아들이 "어머니, 이제 그만하셔도 돼요. 25년 동안 하셨어요. 작은아버지들도 너무하시네." 하며

나를 위로하고 깨진 유리들을 수습하면서 청소를 하고, 그렇게 끝났다. 셋째 동서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 내가 일부러 의도한 게 아니니. 그래, 그만큼 했으면 된 거야. 나는.


큰아들은 아래층 자신의 집에서 자는지 기척이 없다.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자금을 준비하지 못한 채 결혼한 큰아들은 할 수 없이 우리 집 2층의 세입자를 내보내고 거기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남편의 일이 옛날같이 매출이 많지 않아 며느리가 시어머니 가까이 살고 싶지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었다. 시아버지 형제분들이 너무 많고 맏며느리 자리다 보니 오랫동안 사귀었었는데도 막상 결혼을 앞두고는 고민이 많았다는 얘기를 아들을 통해 들었었다.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며느리한테 부담을 주지 않고 모른척하고 지내지만 어제의 시끌벅적했던 일은 아마 며느리도 알았을 것이다. 할 수 없는 일이다.


어제 그 난리 후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호수를 껴서 마당청소를 하고 있는 남편을 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소와 같은 오늘이다. 단지 어머니가 저 위층에 안 계시다는 것만 빼면. 나도 평상시처럼 아침을 준비하면 된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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