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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남편 김광석 May 02. 2016

안녕, 산타크루즈

안전하고 평화로운 필리핀 시골 마을 사람들과의 추억

  시나킴, 잘 지내?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서 나의 안부를 물어온 이 아이의 이름은 '조벌트'다. 그는 필리핀에 있는 작은 마을 '산타크루즈'에 산다. 2013년 필리핀에서 만났는데, 그 때는 내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았던 키가 어느새 키가 160cm나 됐단다. 그와 만난지 벌써 3년 하고도 5개월이 지났으니 그럴 만 하다.


  몇 개월 만에 대뜸 안부를 물어본 이 아이는 '평소처럼'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자신의 말주머니를 연다.


"보스! 나 며칠 전부터

너랑 똑같이 생긴 남자친구를 만나고 있어"


  아마 4년 전 내 얼굴과 닮았나 보다. 필리핀 남자와 닮았다니 썩 반가운 소리는 아니다. 그보다, 이 녀석 사내놈이 남자친구라니 당황스럽다.


  아... 맞다. 3년 전에도 산타크루즈에는 게이가 많았다. 심지어 게이의 주변 친구들도 게이들에게 '그녀'라고 불러주고 있었다. 그때는 우리나라와 다른 문화가 낯설기도 하고, 내 정서와 맞지 않아서 좀 싫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TV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소재가 되면서 무뎌진 것 같다. 덕분에 당황스러움을 빨리 수습하고, 갑작스러운 커밍아웃에 보다 먼 나라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했던 조벌트의 친구들


산타크루즈의 흔한 이동수단(우리나라의 인력거와 같다)


  그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고, 영어에도 익숙지 않았다. 우리는 잔머리를 조금 써서 구글 번역기를 통해 대화를 나눴다. 자잘한 오류가 많다지만 문장 단위로 끊어서 번역하면 큰 문제는 없었다. 나는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고, 그는 영어를 따갈로그어(필리핀 모국어)언어로 번역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그는 이제 번역기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영어와 따갈로그어를 섞어서 수업하는 필리핀의 특성상 학년이 오르면서 영어 실력이 늘어난 덕분이다.


우리 마을은 안전하고 평화로워 보스!


  남자친구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는 또 다시 밑도 끝도 없이 자신의 마을이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했다. 이어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과 산타크루즈는 큰 연관성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그곳은 자신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 땅의 일이라고 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여러 겹의 설명이었지만 첫 마디에 무슨 뜻인지 알아들 나는 안심했다.


  며칠 전 캐나다 유학생을 인질로 잡고 잔인하게 살해한 필리핀 테러집단의 소식이 들리는 등 필리핀 민다나오 섬 일대에 분쟁의 기운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내가 조벌트를 만났던 2013년에도 필리핀 현지 경찰들은 우리나라 군인 수준의 무장을 하고 돌아다녔다. 손바닥만 한 권총이나 전기총, 가스총 같은 것으로 무장한 우리 순경들과 달리, 그곳의 순경은 K-201 같은 유탄발사기가 장착된 기관총을 메고 방탄기능이 탑재되어 있을 것 같은 집차를 타고 다녔다.

동료가 찍어준 산타크루즈 경찰(군복, 기관총, 살인미소로 무장)


  상황이 이러니 필리핀에 분쟁 소식이 들리면 혹시 산타크루즈가 아닐까 걱정하곤 했는데, 사려 깊은 우리 조벌트는 먼 땅에 떨어진 내가 자신들을 걱정할까봐 걱정이었나보다. 덕분에 나는 그들에 대한 걱정을 덜어놓을 수 있었다. (물론, 산타크루즈가 안전할 뿐 누군가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일단 내가 아는 이들이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평화로운 산타크루즈의 일상


  나와 조벌트의 대화는 1시간 정도 이어졌다. 비록, 아직도 영어 실력이 늘지 않은 못난 보스 때문에 '한 번에 한 문장'이라는 규칙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4년여 시간 동안 숙달된 만큼 제약 속에서도 많은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사실, 모든 친구의 대화가 그러하듯 우리의 대화도 특별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오랜만에 연락했으니 소식을 전하고, 묵혀뒀던 옛이야기를 꺼내 들어 공유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조벌트와 그의 친구들을 찍었던 사진을 보내주고, 조벌트는 내가 보내준 이들의 새로운 소식을 전달한다.




  이번에도 우리의 대화는 다르지 않았다. 조벌트는 나와 함께 필리핀에 갔었던 사람 중에 '조'라고 불리던 형과 '앨리스'라고 불리던 친구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는 그와 그녀가 사랑하는 관계이길 바랐지만, 나는 ~그녀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조벌트는 마치 드라마 주인공들이 서로 이어지지 않아 작가에게 항의하는 시청자처럼, 그 결혼을 무효로 하고 둘을 이어주라고 항의했다.


조벌트, 아포바랑가이랑은 어떻게 지내?


  나는 조벌트의 이어지는 '속보'와 '질문공세'가 시들해질 즈음이면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진다. 내가 이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내가 산타크루즈에 갔었던 이유와도 연관된다.


  산타크루즈는 전통 필리핀 혈통을 이어받은 필리핀인과 바다를 통해 들어와 해변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바자우족이 공존하고 있다. 바자우족은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해변에 분포하는 소수 종족으로 '바다와 더불어 사는 종족'을 뜻한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바자우족을 "수상가옥의 오리지널"로 표현하기도 했다.

바자우족이 모여사는 '아포바랑가이'의 해변풍경


  바자우족은 영토를 갖지 못한 종족이기 때문에 어느 지역에서나 '불청객'으로 통용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2~30여 명의 사람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 해변을 점유하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말도 통하지 않고(바자우족은 자신들 만의 언어를 사용한다) 법규도 지키지 않는다. 현대 문물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족의 특성상 현대 문물에 익숙하지도 않다. 원래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이들의 사회.문화적 수준이 비슷하다면 모를까, 캐논 카메라나 삼성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산타크루즈 사람들에게 이들은 골칫거리처럼 느껴질 것이다.

필리핀 국기를 게양하는 바자우족 아이들
카메라를 보고 몰려온 바자우족의 개구쟁이들

  나는 이들 사이의 다리를 놓아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봉사단의 단원으로서 이곳 산타크루즈에 갔었다. 하지만 계획된 모든 임무를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봉사단은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사실, 애초에 경제, 영토, 법규가 엮여 있는 문제를 타지인 몇 명이 가서 돕는다고 해결될 리가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의 최선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교감이 있을 때 어떤 즐거움이 발생하는지 공유했을 뿐이었다.

왼쪽 아래 : SCNHS / 오른쪽 위 : 아포바랑가이


  "봉사단원들이 복귀하면 70% 이상의 원주민은 열흘 안에 '봉사단이 오기 전' 삶으로 돌아간다"는 '장 지글러'의 연구결과처럼, 우리가 떠나온 이후에도 이들 사이에 혁신적인 변화는 없었다. 아직도 바자우족은 환영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필리핀인들은 그들과 교류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조금 나아진 것은 조벌트처럼 우리 봉사단을 기억하는 아이들이 바자우족과 SCNHS 모두에 있어서, 서로를 '친구의 친구'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조벌트에게 '아포바랑가이랑은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을 한 것도, 이전에 조벌트가 아포바랑가이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전했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번 질문에서는 '보스, 나는 요즘그들과 놀지 못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마! 우리 선생님들은 우리가 아포바랑가이 친구들을 도울 수 있는 어른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으니까' 라며 나를 위안했다.

 

  팔찌나 모자, 핸드폰, 카메라 등 자꾸만 나에게 뭘 달라고 조르기만 했던 꼬맹이가 이제는 형의 마음도 헤아릴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늠름한 청년이 되었을 그를 생각하려다가 '남자친구가 생겼어'라는 첫마디가 떠올라서 애매해졌지만, 그가 먼 타지에 있는 형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응원할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은 만족스러웠다.


  그와의 대화를 마친 후에는 항상 여운이 남는다. 메시지 따위로는 풀 수 없는 아쉬움이다. 그들과 만나서 함께 걷고, 뛰고 노래를 불러야 풀어질 갈증이다. 아쉽게도 현실적으로 이뤄질 수 없는 일이기에, 나는 사진첩을 열어 그를 대신한다. 이제는 사진 속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그들의 맑은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그들이 '시나! 시나킴!'하고 부르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렌즈 앞에서 소년은 메롱을 하고 소녀는 고갤 돌리는 것은 만국공통인가보다
조벌트가 다니던 '산타크루즈 국제 고등학교'의 훈남 경비원

우리를 위해 산타크루즈 국제 고등학교(SCNHS)의 학생들이 준비한 공연


태극기와 필리핀 국기를 그

바자우족 아이와 SCNHS의 아이


봉사단의 오른팔이었던 SCNHS의 케넥과 귀염둥이였던 바자우족의 아이(아직도 이름을 몰라 ㅠ)


<노노이의 밤>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필리핀 현지 망고 = 기승전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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