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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남편 김광석 May 16. 2016

시간이 머무는 마을

골목길 모퉁이를 돌면 70년대를 여행하게 된다

갈 곳이 없어서 갔다

  2013년 5월. 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장교가 된 나는 육군 종합행정학교에서 직무 교육을 받고 있었다. 주말이 되면 외박을 받아서 집으로 갔는데, 동네 친구들은 대학생활 중이어서 동네에는 만날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친구가 썸녀가 있던 것도 아니어서 외박마다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려야 했다. (장담컨데 여자친구도 없고, 만날 친구도 없는 군인의 외박만큼 서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더이상 갈 곳이 없을 때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책에서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세계 일주를 했던 여행가의 강연에서 들었던 말 같기도 하다. 출처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누군가에게 듣고 머릿속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던 것 같다.

  평일에는 육군 장교이지만, 주말만 되면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는 한량이 되기를 2개월.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몸이 근질거릴 때, 이 문구가 떠올랐다. 그제야 여행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집으로 가는 티켓 대신 부산행 티켓을 끊었다.


<무제>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무턱대고 출발해서 아무 데나 갔다

  나에게 여행은 철저한 계획 아래서 절차에 따라 이행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몇 시에 일어나서 몇 시에 떠날지, 어디서 무엇을 먹을지, 잠은 어디서 자고 지출은 얼마로 할지. 계획하는 것이 재미있고, 계획대로 하는 것이 안정적이어서 좋아했다. 하지만 이날의 여행은 그렇지 않았다.

  어떤 계획도 없이, 표를 끊었다. 옷도 한 벌 챙기지 않고, 오직 카메라와 삼각대만 들고 떠났다. 열차 안에서 다음에 갈 곳을 검색하다가 잠이 드는 바람에 부산역에 도착해서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했다. 무턱대고 출발해서 아무 데나 갈 판이었다. 처음에는 불안함이 굉장히 불쾌했다. 시간은 밤 11시를 넘어서고 있고, 나는 갈 곳이 없다. 나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이었다. 결국 내일로 여행을 할 때 들렀던 찜질방으로 갔다.


듣고 보니 가고 싶어졌다

  찜질방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한 커플이 다음 목적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화 <아저씨>의 촬영지이고, 벽화 마을로 유명하다는 곳이었다. 70년대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서 향수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가고 싶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들에게 "저기요. 거기가 어딘가요."하고 물었다.

  여자사람보다 남자사람이 더 깜짝 놀라 했다. 동그래진 눈으로 동공을 흔들며 "네? 저희요?"라고 되물었다. 나는 계획이 없이 여행을 왔는데, 사진을 찍고 싶다. 당신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거기가 마음에 든다. 나도 가고 싶은데, 이름만 알려달라 했다. 여자사람이 "아! 사진 찍는 사람들 많이 온다고 하더라구요~ 인터넷에 '매축지'라고 검색하면 나와요~"했다.


오고 보니 역시 좋았다

  도착해서 처음 풍기는 인상은 굉장히 조용했다. 마을 전체에 오래된 기억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았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새로운 여행지에 가면 드는 '콩닥콩닥'하는 설렘 대신 우리집 앞에서 문을 두드릴 때의 안도감이 들었다. 입구로 보이는 벽면에 상큼발랄하게 적혀있는 'SingSing'이라는 슬로건이 이질적이기까지 했다.


<과거로 가는 골목>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기에 생긴 마을이다. 아마도 투박한 미장이 아저씨가 덕지덕지 발라 만들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 트렌드에 맞는 스타일들이 종종 보였다. 아는 형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다 만 듯한 인테리어'스타일의 집이었다. 벽면에 나이테처럼 쩍쩍 갈라진 금이 복고풍이 아니라 정말 옛날에 지어진 건물임을 증명하지 않았더라면, 깜빡 속을 만큼 친숙했다.



<광석아 어디가!?>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골목길을 걷다 보니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하던 형들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고 펼쳐지는 풍경은 추억의 골목길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 내 동네보다는 아버지 앨범 속에 남아있는 흑백의 풍경에 더 가까웠다.


내가 뛰어놀던 동네를 닮은 골목길
아버지 앨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골목길


골목길 모퉁이를 돌면

  냉정하게 말하면, 참 조잡한 컨셉이다. 이쪽 골목을 돌면 동화벽화가 있고, 저쪽 골목을 돌면 영화 벽화가 있다. 넓은 벽면에 아름다운 풍경이 그려져 있지만, 골목이 너무 좁아서 사진으로 담아내지도 못했다. 기념사진을 찍으려면 18mm 상태에서도 바스트샷 밖에 찍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문제는 벽화뿐이 아니라 건물 자체에도 있다. 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개발되거나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지어진 탓인지 골목마다 다른 시간이 머물고 있었다. 입구 쪽은 90년대를 생각나게 하다가, 모퉁이를 돌면 70년대에 지어진 건물들이 있고, 또 걷다 보면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 같은 건물도 있었다.


이쪽 골목의 모퉁이를 도니, 영화 <아저씨>의 벽화가 있고
저쪽 골목의 모퉁이를 도니, 동화 속 벽화가 있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장르가 바뀌고 시대가 넘어갔다.
  철제 전신주가 박히기 전에는 나무로 된 전신주가 서 있었나 보다. 나무니까, 뽑아내기보다 잘라내기를 선택한 것 같다. 시간이 흘러 전신주의 흔적에 새로운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또 다른 골목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높이에 전깃줄이 엉켜 있었다. 뭔가 변압역할을 할 것 같은 장치가 달려 있었다.


  하지만 여행까지 와서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이 마을의 컨셉은 당시 나의 여행과 닮아 있었다. 무턱대고 출발하고 아무 데나 가고 있는 나의 여행이나, 계획되지 않은 것이 하나둘 추가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이룬 마을이나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규칙적이지 않았던 덕분에 모퉁이를 돌 때마다 예상하지 못했던 풍경이 펼쳐졌다. 또 전체를 다 돌아보는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만큼 좁은 곳이지만, 골목골목을 들여다보면 하루를 투자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많은 볼거리가 있었다.


<아직 달린다>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골목에 세워진 자전거는 벨 대신에 뿅뿅이를 달고 있고 여기저기 녹이 슬었지만, 체인 만큼은 기름칠이 잘 되어 있었다. 수 십 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잘 달린다는 뜻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방치된 최신자전거보다 훨씬 더 자전거 다웠다.
<골목초롱>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식물원에서도 보기 힘든 초롱꽃을 골목길에서 키우고 있다


<실내화>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실내화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빨래집게>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언제부턴가 우리 집에선 볼수 없는 빨래집게를 보자,
줄을 달고 코를 집었다가 당기는 장난이 생각났다.


<초록색 소식>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ㅊ
초록색 우체통으로 받아보는 편지는
더 신선할 것만 같다.
<전당포>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아저씨는 이제 분식집을 하신다.
 : <아저씨> 속 전당포가 있던 건물


<HONDA>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시간은 골목 뿐 아니라,
오토바이에서도 느껴졌다
<훈수>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골목길을 이곳저곳 누비다 보니 5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힘든 줄도 모르고 모퉁이를 돌 때마다 달라지는 풍경에 감탄하고 갔던 길을 다시 가 보고, 셀카도 찍고 풍경도 찍으며 돌아다녔다. 마을 아이들은 그렇게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는 아저씨들이 익숙한 듯 V를 보이기도 했다. 중간에는 할아버지들이 장기 두시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한 판의 경기가 끝나니 청군을 두시던 할아버지께서 "봤으면 값을 해야지. 한 장 찍어봐~"하셨다.

  마을 전체의 시간이 몇 십년 동안 멈춰있는 느낌이었다. 알록달로 예쁘게 칠해진 벽의 색감이 좋으면서도 흑백사진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어쩌다 보니 떠나온 여행, 어쩌다 보니 들어가게 된 골목길에서 나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의 어린 시절 그리고 영화 속 한 장면까지 만나볼 수 있는 노다지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이 더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는다. 푸드트럭이 생기고, 포토존이 생기고, 유명한 작가들의 디자인이 이 벽, 저 벽에 생겨나길 원하지 않는다. 이기적이지만, 나이테처럼 쩍쩍 갈라져 있는 금과 미장이 아저씨가 척척 발라놓은 시멘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지금의 모습이 좋다. 조금 위험하기는 해도 화재사고가 일어나거나 감전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정도라면, 마구 엉켜있는 전깃줄도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나중에 다시 갔을 때도 70년대의 느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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