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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남편 김광석 Jul 06. 2016

빛에는 모든 것을 살리는 힘이 있다

정물사진의 기본, 빛에 대하여

중학교 시절. 우리 학교에는 내 얼굴 한 손으로 '몽당연필'을 잡고 그림을 그리시던 미술 선생님이 계셨다. 선생님은 미술용 연필을 놓고 와서 필기용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 그림을 그리려는 나에게서  연필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손톱으로 심의 뾰족한 부분을 깨뜨리고 종이에 비벼 둥글게 만들어 주시면서 '정물'의 기본을 설명하셨다.


정물을 그릴 때는
빛으로 생명을 불어 넣어야해요.


거의 모든 선생님의 말씀이 그렇듯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정물이란 생명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있다 한들 책상 위에 놓인 사과나 화분 안에 꽂힌 꽃송이가 최선인데 어떻게 생명을 불어넣는단 말인가. 그러면 생긴 대로 그리는 사실주의 스케치가 아니라, 추상주의나 뭐 그런 거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머리로 이해한다 한들 그림에 소질이 없는 내가 200원짜리 필기용 연필로 그려낼 수 있을까?


그리라는 그림은 안 그리고 이런 불만을 가졌던 그때의 그 수업으로부터 십수 년이 지났다. 스물일곱 살이 된 나는 얼마 전 북촌의 어느 옥상 카페에서 선생님의 말씀 뜻을 이해했다. 몽당연필과 하얀 스케치북이 아니라, 렌즈와 DSLR의 LCD  통해서 말이다.

<빛을 품다>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이 사진을 담기 직전까지 나는 정물에 빛을 넣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전까지 내가 찍은 거의 모든 정물 사진에 피사체가 반사해 내는 빛 외에는 그 어떤 빛도 들어가지 않은 것이 그 증거다. 이 사진을 찍었던 날에도 빛이 유리를 통과한다는 과학적 상식을 잊고, 역광 사진을 찍기 위해 피사체와 태양을 일렬로 세웠을 뿐이었다. 그 실수가 내 피사체에 태양 빛을 넣어주었고, 시들어 죽은 보리로 담은 것 같은 맥주를 황금빛으로 물들여 주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격"이다.


미술 선생님의 가르침도 집으로 돌아와 모니터를 통해 이 사진을 보고 나서야 떠올랐으니, 이건 정말 실력으로 찍은 사진이 아니다.


아, 갑자기 오글거리는 일본 야구만화 명대사가 생각났다.

홈런타자를 가장 많이 양성했다던 전설적인 감독 캐릭터의 명대사다.


프로 첫 홈런은 타자의 실력이 아니다.
그것은 그 날 상대 투수의 컨디션, 바람의 세기와 방향, 배트의 상태 등 모든 운이 집결되면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두 번째는 조금 다르다.
두 번째 홈런을 친 타자는 첫 번째에 느꼈던 감각을 되찾은 실력자다.


야구뿐만이 아니다. 일정 경지에 도달하는 모든 순간이 그렇다. 처음엔 투자한 노력보다는 우연한 무언가에 의해 경지에 도달하고 그 맛을 찾기 위해 더 많은 노력과 실력으로 잡아내는 것이다.


나는 실력자는 아니었나 보다. 첫날에 찍었던 사진을 찍기 위해 이것저것 많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얻지는 못했다. 첫 번째 사진은 운으로 얻은 것이 분명했다.


결국, 나에게 행운을 안겨다 주었던 장소로 다시 찾아갔다. 똑같은 장소에서 다른 피사체를 놓고 셔터를 눌렀다. 분위기 좋은 곳을 알려준다며 데려간 친구마저 버려두고 셔터만 눌러대는 게 자신도 미안할 정도였다.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한다 ㅋㅋ)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카페에 다시 가기로 했던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는 맘에 드는 사진을 찍기 위해 그리는 구도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삼각대를 접었다 폈다, 앉았다 일어났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한 뒤에야 맘에 드는 사진 세 장을 건졌다. (첫날에는 나도 모르게 1장을 건졌지만, 이날은 의도적으로 3장을 건졌으니 나쁘지 않았다.)


<빛을 품다 2>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쓰고 나니 너무 거창하게 말한 것 같아 쑥스럽다. 나는 힘들게 배운 것이지만, 누군가에는 그저 셔터질 몇 번에 배운 기본기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사진과 경험이 맨땅에 헤딩하듯 셔터 질을 하고 있을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후에 책을 통해 공부해보니, 빛으로 피사체를 살아있게 만드는 기법은 다양하다.

심지어, 내가 담았던 몇 장의 사진 중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한 사진들을 몇 장 전시하며 이번 글을 마친다.

쏟아진다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역광으로 꽃의 실루엣만 찍으려 했는데, 측광을 잘못해서 '후광'이 살아났다.

덕분에 꽃이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 강해졌다.


참이슬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비가 오던 날 찍은 사진이다. 꽃이 핀 방향에 있던 카페가 쏘아준 조명 덕분에 꽃잎에 생기가 맺혔다.

어흥 / Canon EOS 550D / EF 18-55mm / 김광석

강남 봉은사의 사자상이다. 불상을 비추기 위해 뿜어져 나오는 조명 때문에 강한 역광상태였다. 주머니와 가방에 있던 LED 3개와 스마트폰 LED를 총동원해서 사자상의 각 부위와 돌멩이들을 살렸다.


<이 글의 모든 이미지는 스마트폰 환경에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사진은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없으며, 공유 시 출처를 반드시 표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더 많은 사진은 https://www.instagram.com/photographer_seok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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