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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툰남편 김광석 Sep 14. 2016

올 겨울에는 수확을 할 계획이다

겨울은 수확의 계절이다

가을이다. 여름처럼 덥고 습하지만, 내 코에 알레르기 반응이 심해진 것을 보면 분명히 가을이다. 한 해 동안 심어 두었던 씨앗들을 수확해야 하는 가을이다.


가을이 오면 마음은 차분해지지만 머리는 분주해진다. 올 한 해에 내가 얻은 건 무엇이고, 잃은 건 무엇이며, 얻을 수 있지만 아직 미처 얻지 못한 건 또 무엇인지 셈을 하느라 그렇다.


올해는 여러모로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아직 미처 얻지 못한 것도 많다. 보통은 이럴 때 미처 얻지 못한 것을 하나라도 더 수확하려고 손놀림이 바빠진다. 하지만 올해는 농부의 마음을 갖기로 다짐했다. 농부 중에서 새와 들짐승과 땅에게도 남는 것을 양보할 줄 아는 농부의 마음이다. 그래서 미처 얻지 못한 것에 대한 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2016년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러기에는 9월은 너무 이르다. 미처 얻지 못한 것을 놓아두면서 놀지도 않겠다는 나의 대안은 '새로운 시작'을 수확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올 겨울에 시작을 수확할 거다.




겨울은 잔인하다. 겨울은 날카롭다. 겨울은 무섭다.


겨울은 늘 그랬다. 어느 순간 훌쩍 다가와 온 세상을 껴안았다. 그러면 이불속을 제외한 모든 공간이 나의 살을 부술 듯이 꼬집거나 할퀴면서 공격해왔다. 그러면 나는 두꺼운 옷과 목도리와 모자로 온몸을 둘둘 말아 어딜 가든 이불속에 있는 기분을 유지했다. 그래야만 가고 싶은 곳을 가거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2014년에 시작된 겨울이 끝무렵에 들어서며 겨울의 횡포가 물러갈 즈음 나는 설악산에 올랐다. "날씨가 조금 풀렸다"는 선배의 말을 믿고 몸을 둘렀던 이불을 벗어내고 집을 나섰다. 해발 수 백 미터부터 시작되는 코스의 문 앞에서 장비 상태를 점검하면서 "속았다"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의 겨울은 끝무렵에 들어섰지만, 설악산의 겨울은 아직 건재했기 때문이었다. 봄이 온다는 뉴스가 나오던 날, 눈이 내린 설악산은 입구부터 눈이 소복이 쌓여서 통행금지구간도 있었으며, 그 사이에 녹았다가 다시 얼어버린 구간도 있었다.


올라가는 내내 넘어지고, 내려오는 내내 미끄러졌다. 봄이 왔다길래, 무거울까 봐,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놓고 나온 아이젠이 계속 떠올랐다.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내가 내려온 길을 돌아봤다. 오르기 위해 올려다보던 산과 같은 산이었지만 느낌이 달랐다. 단순히 느낌인 줄 알았던 그 오묘한 차이는 산을 조금 더 내려가니 '사실'이 됐다.


하지만 겨울은 온 힘을 다해 '봄'을 준비하고 있다.


입구와 올라가는 길과 내려오는 길은 모두 겨울이었지만, 내려온 곳은 봄이었다. 푸르게 생기를 찾아가는 나무와 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 그리고 푸른 하늘의 조화는 겨울을 뒤로하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봄을 떠오르게 했다. 준비 없이 오른 겨울의 산에서 봄을 맞이한 셈이었다.




겨울이 갑자기 온다면, 봄은 슬며시 온다. 오지 않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와 있다. 무서운 속도로 모든 것을 파괴하며 달려오는 겨울과 달리, 아주 조용하게 씨앗을 뿌리며 온다. 분명 이번 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마르고, 얼고, 멈추고, 죽고


봄이 뿌리는 씨앗에는 생명의 힘이 가득하다. 마르거나 얼어붙은 겨울을 뚫고 나오는 그 생명력은 '위대함'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뿌린 씨앗이 아니기에 내가 다룰 수 없다. 스스로 자라나고 늘어나고 번성한다. 그 과정에서 내 안에도 어느 정도 생명의 기운을 심어주지만, 것은 내가 심은 것이 아니기에 내가 키워낼 수 없다. 나는 늘 그 점이 아쉬웠다. 아름다운 것들의 탄생과 성장을 밖에서 지켜만 봐야 하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 겨울에는 철저한 준비를 할 것이다. 내년 봄이 올 때 나만의 씨앗을 뿌려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할 계획이다. 내가 심을 수 있는 씨앗인 '글'과 '사진'을 적당히 교배시킨 종으로 준비할 것이다. 겨우내 그 녀석들을 잘 수확해 두었다가, 봄이 오면 세상에 뿌릴 것이다.


계절은 더위로 혼란을 주고 있다. 내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서, 게으름을 피우도록 하려는 것 같다. 나는 속지 않았다. 아니, 잠시 속았었지만 추석이 알람이 되었다. 곧 겨울이 온다. 나의 새로운 시작을 수확해야 할 겨울이 온다.


견디고, 참고, 성장하고, 태어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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