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리터러시 : 네 번째 이야기
요즘 부쩍 이석증과 이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졌다. 귀 안에서 삐 소리가 끊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 모두들 처음엔 단순한 피로나 일시적인 현상이라 여겼지만, 병원을 찾고서야 알게 된다. 몸이 보내는 경고음이었다는 것을.
몇 년 전, 나도 이석증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갑자기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귀 안에서 알 수 없는 소음이 들려왔다. 처음엔 피곤해서 그런가 했지만,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뜻밖이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내 삶을 되돌아보았다.
"나는 정말 쉬고 있는 걸까?"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 감각은 예민해졌지만, 정작 진짜 감정에는 무뎌지고 있다. 이명과 어지럼증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라, 어쩌면 과잉된 감각과 쉬지 못하는 삶에 대한 몸의 항의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우리는 조용한 풍경 속에서 쉬고 싶어한다.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하루의 리듬이 되었고, 창문 너머 산들바람이 마음을 톡톡 두드리며 위로해줬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감각의 파도에 휩쓸리고 있다.
현대인은 스마트폰으로 하루 수백 번의 알림을 받으며, 잠시도 고요할 틈 없이 끊임없이 반응하고 있다. 음악은 끊이지 않고, 광고는 눈을 쉴 새 없이 파고든다. 그 속에서 우리는 점점 ‘반응하는 기계’에 가까워지고, 고요를 견디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간다.
감각이 살아있다는 것은 원래 좋은 일이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을 가진 존재로 보았고 경험과 관찰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감각이 지나치게 활성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감각은 더 이상 경험의 문이 아니라, 피로의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진짜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느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는가?"
잠자기 전에는 수면 유도 음악을 틀고,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틈만 나면 유튜브를 켜고, 잠시 멍하니 있는 시간에도 책을 펼친다.
나는 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진정한 쉼은 해본 적이 없다.
쉬는 것조차 자극으로 채우고 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자극받는 시대는,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시대다. 계속되는 자극은 신경을 무디게 만들고, 결국 우리는 진짜 감정을 잃어버린다. 예전엔 꽃 한송이에도 감탄하던 사람이, 이제는 숲을 봐도 "그래서 뭐?"라고 말한다.
그럴수록 나는 떠올린다. 조지훈의 시 <승무> 속 한 구절을.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고이 접는다는 건 어떤 마음일까. 자극과 욕망, 피로를 조용히 접어 올리는 일이다. 나비처럼 가볍게, 아무런 무게도 없이 떠오르듯 춤추는 순간. 시인은 말한다. 가장 아름다운 몸짓은 비움에서 비롯된다. 그 춤사위는 움직이고 있지만, 그 안에 머무는 것은 고요다. 그리고 그 고요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가장 잃어버린 감각이다.
우리는 소음 속에서 침묵을 갈망하고, 자극 속에서 진짜 감동을 찾고 있으며,
과잉의 홍수 속에서 절제와 의미를 되묻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많은 정보와 더 많은 감각이 아니다.
오히려 덜 보고, 덜 듣고, 덜 말하면서 더 깊이 느끼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이다.
이처럼 이명이나 이석증은 몸이 보내는 ‘감각 과부하’의 경고음일지도 모른다.
삶에 여백을 둘 줄 아는 사람에게, 쉼은 조용히 깃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