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임 리터러시 : 다섯 번째 이야기
요즘 나는 회사 업무를 할 때면 자연스럽게 AI에게 말을 건다.
마치 조용한 조수처럼, 보도자료를 다듬고 행사 내용을 정리해준다.
계산기처럼 정확하고, 알고리즘처럼 빠르니
속도 면에서는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 똑똑함이 종종 나를 멍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무렇지 않게 틀리고, 아무렇지 않게 다시 말한다.
마치 실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얼마 전, ‘솔버톤(Solverthon)’이라는 단어에 대해 물었을 때였다.
AI는 “Solution과 Marathon의 합성어입니다”라고 답했다.
순간, 어딘가 낯설었다.
가슴 속 어딘가에서 작은 경고음이 울린 듯했다.
‘뭔가 이상한데…’
그 촉 하나로 나무위키를 열어 다시 검색했다.
정확한 어원은 ‘Solve’와 ‘Marathon’의 합성어였다.
내가 그 오류를 지적하자,
AI는 부끄러움 하나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네, 솔버톤은 ‘Solve’와 ‘Marathon’의 합성어입니다.”
사과도 없고, 흔들림도 없었다.
그 정확함 뒤에 인간을 향한 부끄러움이나 미안함은 없었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이런 실수 하나가 오히려
사람에게 남겨진 자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는 걸.
며칠 전에는 브런치에 에세이를 쓰다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물었다.
AI는 철학자의 이름과 키워드는 막힘없이 쏟아냈지만,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상보다 현실, 추상보다 경험, 우연보다 목적을 중요시하는 철학자라는 것을 놓쳐버렸다.
‘왜’라는 물음 앞에서, AI는 조용했다.
그럴수록 나는 사람의 자리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계산 너머의 감정,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주저함,
데이터로는 설명되지 않는 미묘한 진심.
그건 여전히 사람의 촉, 사람의 속도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누군가의 미소 뒤에서 슬픔을 읽고,
말 한마디의 멈칫에서 진심을 느낀다.
AI는 이것을 계산하지 못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촉’도 언제나 옳지는 않다.
1692년, 매사추세츠의 한 청교도 공동체였던 미국 세일럼 마을에서
한 소녀의 이상한 행동을 본 마을 지도자가 이렇게 말했다.
“느낌이 이상해. 저 아이는 마녀야.”
그 한마디가 불을 질렀다.
공포와 편견으로 키워진 촉은 마녀사냥이 되었고,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왠지 수상해’라는 말은
총200여 명의 사람이 체포되고 약20명이 처형 당하는 등 사람의 인생과 마을을 뒤집었다.
그런 일은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조직에서도 ‘촉’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숫자보다 이미지, 실적보다 분위기,
"왠지…"라는 말들이 조용히 판단을 만든다.
“쟤는 야망이 없어 보여.”
“느낌상, 저 사람은 리더감이 아니야.”
“감이 안 좋아. 뭔가 불편해.”
이런 말은 평가표 어디에도 없지만,
승진 명단을 가르는 결정적 '감'이 된다.
정확한 근거 없이 기회를 잃고,
사람의 가치를 느낌 하나로 재단당한다.
그리고 그 촉은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준다.
‘내가 뭔가 부족한 사람인가 보다.’
‘분위기상, 나는 안 맞는 사람일 거야.’
이런 생각은, 내 촉조차 나를 지우게 만든다.
사실 나는 촉이 느린 사람이다.
누군가의 감정을 늦게 알아차리고,
빈틈을 뒤늦게 채우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느린 촉 덕분에,
나는 누군가를 더 오래 바라보게 되었고
지나친 감정을 곱씹으며 배워가고 있다.
AI는 틀려도 당당하지만,
나는 틀릴 때마다 작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느린 속도 덕분에 나는 지금,
사람의 자리에서 조금씩 자라고 있다.
기계가 흉내 낼 수 없는
느낌, 머뭇거림, 그리고 미세한 떨림까지 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