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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AI 시대를 준비하는 시선

프레임 리터러시 : 세 번째 이야기

우리는 그를 인간이라 불러야 할까.

로봇이라 불러야 할까.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 3층 상설 전시장.

내 눈앞에 마네킹이 서 있었다.


그의 팔과 다리는 금속이었고,

심장과 뇌마저 기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발을 멈췄다.

그리고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 존재를 인간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면 로봇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기술은 이제 인간의 몸을 하나둘 대체하고 있다.

피지컬 AI, 기계 팔, 인공 심장, 신경 연결 장치.

인간은 더 이상 ‘살’과 ‘뼈’로만 정의되지 않는 시대를 향해 나아간다.


그 변화는 때로는 희망으로 다가온다.

선천적으로 팔다리를 잃은 아이에게,

기계 팔은 그림을 그리고, 문을 열고, 손을 잡는 삶의 확장이다.

심장병을 앓는 누군가에겐, 인공 심장은 생명을 지키는 기적이다.


기술은 분명, 인간이 조금 더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경계가 무너질수록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까지 인간인가?"

"몸이 기계여도,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인가?"


이건 단순한 과학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다시 정의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문득, 문학 속 장면들이 겹쳐진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쾌락과 통제 속에서 인간은 선택할 자유를 잃고,

『1984』에서는 기억과 사고마저 통제당한 인간이 ‘존재’조차 부정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전시장에서,

말없이 서 있는 금속 마네킹 앞에서 그들과 닮은 무언가를 느낀다.


죽음을 넘어서는 기술은, 진짜 인간을 더 잘 살게 만들까?

아니면 인간의 자리를 재편하는 것일까?


삶은 유한하기에 소중하다.

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고, 망설이고, 후회하고, 기뻐한다.

‘영원한 삶’은 그 감정의 결을 흐리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죽음을 향해 사는 존재로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기술은 분명히 누군가에겐 ‘기적’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경계’다.

어쩌면 인류는 새로운 진화를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잊은 인간에게 불멸은 축복일까?

아니면 가장 은밀한 감옥일까?


‘끝’이 없는 하루는 목표를 잃고, 감정은 둔해질지도 모른다.

사랑, 우정, 회한, 기쁨…

그 모든 감정은 '유한성' 위에서 피어난 것들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인간이 죽음을 자각하는 존재”라면

그 말은 곧, 죽음을 지운다면 인간도 지워질 수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마네킹을 바라본다.

"나는 이 존재를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다양한 시선이 뇌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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