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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절이 두 번 굽은 스탠드가 켈빈 값이 낮은 빛으로 희고 넓은 테이블을 밝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까눌레와 스콘, 에그타르트, 파운드케익이 가득한 쇼케이스에서 빅토리아 케이크와 더블 치즈 타르트를 골랐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유행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찾는 것보다 대상이 바뀌는 속도가 빨라 이제 그냥 유행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는 흑임자 케이크는 검은 깻가루가 콕콕 박힌 크림을 보기만 해도 텁텁해지는 기분이라 좋아하지 않지만, 이곳에는 다른 선택지가 많아 상관없었다.
투명하고 납작한 유리잔에서 찰랑이는 생수와 수술대에서 사용하는 매스처럼 끝만 짧은 곡선으로 날이 선 나이프가 보기 좋았고, 어두운 공간을 불규칙한 리듬으로 가득 메우는 일렉트로닉 사운드와는 어울리지 않게 하얗고 각진 선반에 가지런히 놓인 드리퍼가 주는 묘한 만족감이 썩 괜찮았다. 완벽에 가깝다고 하기엔 어렵지만 그리 나쁘지 않고, 꽤 근사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훌륭하지는 않은 애매한 환경이 오히려 편했다. 기대하지 않은 것보다는 좋았고, 공간만큼 내 것이 ―그것이 무엇이든― 좋아야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테이블을 분절하는 동그란 불빛의 온도와는 다르게 손끝에 느껴지는 공기가 차가웠다. 집에서는 프로그램을 두 개만 같이 실행해도 시끄러운 소음을 내던 노트북 팬은 미동도 없었다. 지금은 그래픽 프로그램을 하나도 사용하고 있지 않으니까 당연한 것이겠지만, 손끝에 닿는 익숙한 열기가 왠지 필요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비트의 여파에 미세하게 진동하는 유리 속 수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현기증이 일었다. 커피를 두 잔 마신 탓일까. 능숙하게 튕기지 못하는 볼펜은 두어 번 떨어뜨리고 그만두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허공에 멈춰 머쓱해진 오른쪽 팔이 간지러웠다. 괜히 열감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소매를 걷으니 팔 한 중간에 커널형 이어폰 캡 크기만 한 작은 물집 같은 게 있었다. 검은 잉크로 동전 크기의 둥근 미로를 새겼던 자리였다. 아니 물집이 생기고 있었다. 느리지만 확실한 속도로 곧 타투를 가릴 것 같이 커졌다. 얇은 껍질이 찢어지더니 안에서 부글거리는 노란색 고름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 보였다.
깨끗한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다. 라고 생각했나. 고름을 닦아야 했다. 멍하니 바라보다가 커피를 받을 때 몇 장 챙겨 온 티슈를 집어 들었다. 습관적으로 사진을 찍을 땐 예쁘지 않아 의자 아래로 내려두었던 것이었다. 테이블 위로 넘쳐흐르기 전에 치워야 되지 않을까, 이 쌀알 같은 고름을, 근데 건드려도 될까,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이 고름을 걷어낸 아래에는 뭐가 있을까, 벗겨진 피부? 구멍? 뼈가 보이는 구멍? 따가울까, 아플까, 참을 만할까, 물집이, 고름이, 내 팔에, 왜?
움찔거리던 노란 쌀알은 조금씩 길어지더니 흰 국수 면발처럼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닦아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겨우 두 겹인 티슈 한 장을 구멍에 가져다 대 막으려 시도해 볼 뿐이었다. 일단 조치를 취하니 꿀렁대던 면발이 멈췄다. 생각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아니다. 비현실적인 비주얼과는 달리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조심스럽게 티슈를 떼어내자 빨갛게 익은 동그란 흔적이 보였다. 완전히 아문 흉터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멍이 난 것도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는 넘쳐흐른 면발 모양 고름이 크림처럼 묻어있었다. 남은 케이크 조각을 찍어먹어 보고 싶을 정도로 하얗고 도톰했다.
카운터를 슬쩍 보니 아르바이트생은 핸드폰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영상이라도 찍어둘 걸. 핸드폰을 집어 들어 이제 분홍빛으로 변한 흉터를 찍었다. 주변이 어두워 자동으로 플래시가 터졌다. 찍힌 사진 배경에 보이는 고름이 희게 빛났다. 홈 화면에서 잠시 고민하다 메신저 친구 목록을 주욱 내려 이름을 찾았다.
이 현상을 이해해줄 단 한 명을 알고 있었다.
BUTTER CREAM
2022
카페 하나 소설 하나 (1cafe1page)
한 카페에 방문해 하나의 엽편소설을 씁니다. 커피를 다 마시기 전에 짧은 소설을 엮습니다. 하나의 소설은 끝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작도 아닙니다. 열 편이 될 때까지 계속합니다.
따뜻하게 지켜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