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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벼룩 Jul 22. 2022

마카로니 앤 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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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조리개가 느리게 닫히는 것처럼 시야가 탁 막혔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어 손에 들고 어둠에 적응되기를 잠시 기다렸다. 어지러운 열기로 뜨거운 등과 달리 팔 끝으로 서늘한 공기가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컴컴한 펍 안을 큰 걸음으로 들어가 커피머신 오른편 바 스툴에 몸을 얹고 주위를 살폈다. 그가 출입구 쪽 벽으로 가려진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앉는 것은 십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대충 걸친 파스텔 톤 체크무늬 반팔 셔츠 너머로 아직 물이 배어 나왔다. 목덜미에 서린 땀이 천천히 식는 것이 느껴졌다. 열기를 뺏겨 표면에 물기를 머금고 차가워진 맥주병이 된 것 같았다. 선글라스를 다시 끼고 손짓을 하자 붉은 천으로 유리잔을 닦던 바텐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등을 돌려 라프로익 15년 병을 집어 드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소리를 냈다. 다소 다급하고 이상한 신음이었다.


바텐더가 돌아보자 그는 손사레를 치며 바 안쪽에 쌓여있는 메뉴판을 가리켰다. 오늘은 메뉴 첫 장에 적힌 글씨를 모두 읽고 주문을 할 생각이었다. 에스프레소…, 아메리카노…, 플랫화이트…, 도저히 물에 탄 것은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았고…. 시럽을 열 번 정도는 뿌린 뜨거운 라떼에 위스키를 때려 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커피가 들어간 몇 개 되지 않는 메뉴 이름을 반복해서 훑으며 조금 어색하게 되뇌다 상단에서 멈췄다. 헛기침을 한 뒤 정확한 발음을 하려고 노력하며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곧 그라인더가 묵직한 향을 내며 진동했다. 김이 나는 커피머신을 바라보니 그 날 아침, 부엌에 들어찬 진회색 연기가 눈 앞을 가리는 것 같았다.      





전날 밤도 여느 때처럼 테이블에 놓인 병 너머로 식탁의 매끈한 나뭇결이 보일 정도로 술을 마셨다. 냉장고 깊숙히 들어있던 반쯤 남은 샴페인―도대체 언제적 샴페인인지, 그게 왜 남아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을 포함해 모든 병이 비자, 함께 있던 누군가가 그의 노래는 사실 악기 빨이니 깁슨 사에 저작료를 나눠줘야 한다며 모욕하기 시작했다.


그는 애들이 쓰는 악기로 연주해도 그 노래가 좋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멜로디카를 꺼내기 위해 이층으로 올라갔고, 그 사건 이후 한 번도 열지 않은 방문을 그런 것 치고는 단호한 몸짓으로 벌컥 열었다. 작은 침대 옆에 붙은 흰 벽장문을 뜯듯이 열고 몸을 구겨 넣자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던 물건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바닥에 섞여 있는 장난감이며 옷가지들을 뒤졌지만 멜로디카는 눈에 띄지 않았다.


“멍청한 멜로디카 같으니….”


화가 나려고 하던 참에 발에 채여 벽장 밖으로 튕겨나간 노란 상자를 발견했다. 한 손으로 상자를 치켜든 그는 왠지 의기양양했다. 상자를 위 아래로 흔들며 난간에 기대 쿵쿵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와 보니 불 꺼진 부엌 창문 너머로 푸른 새벽 공기만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저 멀리 노르스름한 햇빛이 비치는 것도 같았다.


“빌어먹을.“


그는 욕을 읊조리며 들고 있던 상자를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에 던져 넣었다. 미끄러져 들어간 작은 상자가 오븐 안쪽 깊숙한 벽까지 가닿는 소리가 툭 들리는 것도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휘청이는 손이 움직이는 대로 버튼을 눌렀다―아마 네 다섯 번 정도는 눌렀을 것이다―. 델 것 같이 뜨겁게 익은 맥앤치즈를 입 안 가득 꽉꽉 채워 한 번에 삼켜버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잔에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던 중 무엇인가 터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스파크가 일었다.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에서 매캐한 연기가 잔뜩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재작년 여름 이웃의 조카가 영업부 신입사원으로 들어갔다는 말에 괜히 새것으로 교체한 ―가스 불을 사용하는 요리라고는 하지도 않는 부엌이었다― 스프링클러가 자동으로 작동해 온 부엌에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머리칼 끝으로 차가운 물줄기가 흘러내리며 그의 얼굴을, 옷을, 온 몸을 적셨고, 그는 그저 눈을 질끈 감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몸에 좋지 않으니 자주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공연이 끝난 늦은 밤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 방에서 아내 몰래 데워 먹던 노란 맥앤치즈 상자를 아이는 유난히 좋아했다. 작은 양 손에 딱 맞게 잡히는데다가, 흔들면 마카로니들이 부딪히며 나는 찰박거리는 소리가 마음에 들었겠거니 했었다. 둘이서 숨죽이고 웃으며 맥앤치즈를 먹고 나서는 엄마에게 들키지 않아야 한다며 옷장 안에 상자를 숨겼다. 아내는 그가 살금거리며 침실로 돌아올 때마다 장난조로 타박하곤 했지만, 공연 일정이 흔치도 않았던 때였기에 강하게 만류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날 공연에서 사용한 기타 피크를 주머니에서 꺼내 아이 손에 쥐어주곤 했다. 색색깔의 작고 얇은 삼각형 플라스틱 피크들을 삼킬까봐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언젠가 자기 몸에 맞는 기타를 갖게 될 때까지 자라 피크가 기타 줄을 긁어내리는 감각을 느끼게 될 때에는 공연의 진짜 쾌감도 알려주리라 다짐하는 마음이었다.


아이가 여섯 살이 되던 해, 그의 밴드는 네 번째 앨범 발매를 기념하며 은빛 알루미늄 피크를 제작했다. 실물 앨범 케이스에도 특별 기념품으로 끼워 두었고, 실제 공연에서도 사용했다. 대량 제작한 피크였기에 기타를 치다 흥분해서 피크를 놓치면 스피커 위에 쌓여있는 더미에서 하나를 집어 이어가는 식이었다. 다른 것들과는 조금 다른 무게감과 촉감을 아이가 느끼길 기대하며 한 줌 집어 주머니에 넣어왔었다.


벽장에는 멜로디카가 처박혀 있었어도, 마이크로웨이브 오븐에 알루미늄 피크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 안 되는 것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찰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짙은 대리석 바 테이블 위로 하얀 커피 잔이 놓였다. 찰랑이는 커피가 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 다시 선글라스를 벗고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딸랑….      


문 열린 바깥으로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카로니 앤 치즈

2022


카페 하나 소설 하나 (1cafe1page)

한 카페에 방문해 하나의 엽편소설을 씁니다. 커피를 다 마시기 전에 짧은 소설을 엮습니다. 하나의 소설은 끝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작도 아닙니다. 열 편이 될 때까지 계속합니다.

따뜻하게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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