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을 치고 있는 당신에게
너에게 바닥을 줄게.
한동안 바닥을 치고 있다는 너의 한숨 섞인 말에 나는 바로 답하지 못했지. 고르고 골라 최선의 말을 하고 싶었기에 그 자리에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어. 대신 밤새 누워 고민을 해봤지.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그리곤 이렇게 말하기로 했어. 너에게 바닥을 줄게. 바닥이 싫다고, 바닥을 허우적대는 내가 싫다고 토로한 네겐 이 말이 탐탁지 않게 들릴지도 모르겠어. 얘가 날 놀리는 건가 싶기도 하겠지. 그러나 오해는 말고 조금만 더 읽어주겠니.
내게도 수많은 바닥이 있었지. 그중에서도 우선 한번 기분 좋은 모양에 대해 한번 얘기해볼까. 어린 시절 어느 날 조각잠을 자던 할머니 방의 뜨뜻한 아랫목.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 오래돼서 집 전체가 난방이 잘 안 되는데 그곳만 유일하게 난로 같았었거든. 가족들이랑 옹기종기 티비를 보다가 몰려오는 졸음을 어쩌지 못하고 구석에 웅숭그려 누웠는데, 그 짧은 사이 나는 꿈속에서 아주 새파란 초원을 거닐었었어. 잠에서 깨자마자 너무 상쾌한 바람에 옆에 있던 엄마한테 실컷 자랑도 했거든. 얘 그거 길몽이다- 뭔가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봐-하며 두런두런. 바닥은 그날 내게 오래 품고 갈 따뜻함을 준거더라.
그렇게 할머니가 손주 보듯 다정하기만 하다면 좋겠지만, 너도 동의하듯이 바닥은 그렇게 만만치 않잖아? 불호령을 내리고 깜깜하게 가두고. 버둥거릴수록 더 빠지기만 하던 늪의 바닥이 내게도 있었어. 힘없이 방바닥에 늘어져 있던 그 차가운 감촉이 생생하기도 해. 끈끈이에 붙어 오도 가도 못하는 쥐 같았던 시간이었지. 사실 지금도 어떻게 벗어났는지 알 수가 없어. 뒤늦게 짐작해보건대 그냥 난 내가 딛는 줄도 모르게 바닥을 딛고 선거였어. 허우적대던 시간이 어쩌면 전부 바닥에 발을 대려는 시도들이었던 거야. 그 후로는 내 위치를 조금 더 잘 가늠하게 된 것 같아. 미연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센서등을 하나 얻은 기분이랄까.
물론 그래도 바닥은 피할 수 없는 법이었고, 나 역시 지금도 종종 바닥을 향하고 있다는 걸 느끼곤 해.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또 딛어보려는 허공의 발짓을 시작하는 거지. 그냥 이거 하나 꼭 말해주고 싶었어. 분명한 건, 바닥이 바닥이라 다행이라는 거야. 둘러보면 모두가 각자의 바닥을 헤매는 와중에 바닥의 바닥까지 다녀온 이들의 후일담이 그걸 직접 알려주고 있더라. 그러니 너의 바닥을 한심하거나 부끄러운걸로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 되려 바닥이라는 느낌이 있어 다행이라고 조금이라도 안심했으면 좋겠다. 중심을 잡는 게 오래 걸려도 일단 딛는 연습부터 하면 되니까. 아, 그리고 너에게 바닥을 줄게. 너의 바닥 아래에 나의 바닥을 덧대보자. 자꾸만 어디론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보탬이 되려고 나도 여기 있어 볼게.
여전히 나는 너의 바닥의 생김새와 느낌을 정확히 알 수는 없어. 너도 애써 묘사할 뿐 내게 보여줄 수도 없겠지. 날이 유난히 춥던데, 그래도 오늘은 그곳에 찬 기운이 올라오지 않도록 부들부들한 담요 하나 깔려있으면 좋겠다. 오늘은 어제보다 푹 잠들 수 있기를 바라며 이만 줄일게.
추신.
이 글은 정호승 시인의 <바닥에 대하여>를 읽다가 작성하였습니다.
바닥이 있어서 다행인 것이라면 바닥을 한 겹 더 덧대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거든요. 너에게도 나에게도.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