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지도 못하면서 추운 것도 싫어하면서 비행기표를 끊었다
작년 11월, 카페에 앉아 오매불망 기다리던 회사의 필기 불합격 결과를 받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꿈에 부풀어 신나게 마음속 성을 쌓아 올렸지만 그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파도 한 번에 쉬이 무너지는 모래성이었다. 취업 준비를 하는 내내 이런 일들의 연속이다. 이미 처음이 아니다. 얼른 무너진 잔해를 치우고 땅을 판판히 다지고 다시 이번엔 어떤 모양으로 한층 한층 쌓아가볼까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주춤댈 시간이 없다는 강박이 있다. 이렇게 멍하니 모래성이 사라진 자리를 한가로이 쳐다볼 시간이 어딨어-하며 나를 재촉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달랐다. 앉은 자리 그대로 정말 텅 빈 깡통처럼 한참을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정말 될 줄 알았는데 어떡하니 정말- 담담한 척하는 나의 앞에서 엄마가 더 속상해한다. 실은 그런 엄마의 표정을 보는 일이 더 힘들다. 마음을 차분히 관리하려고 해도 내가 애써 덮으려는 지점을 건드리는 타인의 반응 앞에서는 결국 난감해진다. 막막함에 헛웃음이 나왔고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마음. 정지된 상태. 동력의 실종. 10월에 퇴사하자마자 연이은 새로운 도전들이 있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감각 때문에 더 그런 듯했다. 아이고 이걸 어쩌나-싶으면서도 그다음 행동과 생각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굳어지는 감각을 경계한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제일 먼저 위장이 굳고 다리도 굳는다. 지금 이렇게 머리까지 얼음이 된 기분은 내 안의 어떤 에너지가 다 떨어졌다는 신호다. 마음에 주유를 해야할 시간인 거다. 계기판 눈금은 바닥이여도 바퀴가 굴러갈 수 있는 상태일 때에 얼른 주유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나는 이런 심정으로 떠나는 날들이 있다. 떠나야지만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자꾸만 움직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가만히 있어야만 할 것 같이 소진되었을 때 가만히 있지 않고 평소보다 나다니게 된다는 이상한 이상한 아이러니를 갖고 있는데, 이번에 내 결심이 향한 곳은 바로 덴마크였다.
원래는 사촌 언니들이 머물고 있는 영국을 갈까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 가면 겨울의 런던은 어쩌다 보니 세 번째 방문이라 새롭기보다는 친근한 감정이 큰 도시가 되었기에 아예 낯선 자극도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코펜하겐을 먼저 들르기로 했다. 겉으로는 생뚱맞은 덴마크행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덴마크 여행은 오랫동안 나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비록 코로나 때문에 모든 걸 취소해야 했지만, 20년도에 영국 교환학생을 마치면 덴마크로 넘어가려고 비행기표도 끊어놓기도 했었다. 게다가 마침 몇 주 전에는 친한 친구가 덴마크로 출장을 간 걸 보면서 한창 부러워했던 차였다. 아 지금이 기회구나 싶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덴마크 출장을 다녀온 친구와 만날 수 있었다. 디자인 뮤지엄 엽서와 헤이에서 사온 성냥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네가 이렇게 바로 덴마크에 갈 줄은 몰랐네. 그러게, 나도. 내 손에 들어온 아이들의 고향으로 탐방을 떠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추위에 약하다. 추운 걸 질색하면서도 12월에 눈바람이 매서운 나라로 가기로 했다. 일하는 동안 허리도 망가졌다. 매일 통증이 달라지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걸어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이전과의 여행 성향과 달리 여력이 없어서 치밀한 계획은 세우지 않았지만, 핫팩과 파스는 꼼꼼히 챙겼다. 짐 무거우면 힘드니까 옷도 뭐도 다 간소화하면서도, 캐리어 한쪽에는 하루에 하나씩 써도 모자라지 않을 정도로 핫팩과 파스를 꽉꽉 채워 넣었다. 결국엔 무게가 어마어마했다마는 그렇게 대비해 간 건 지금 생각해도 아주 잘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묵직하게 굳은 몸마음을 끌고 나는 혼자 덴마크로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