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볕뉘 Mar 25. 2024

크리스마스 추리 용품

우리의 마음 속에 연말마다 풍성해지는 트리가 하나 있다고 상상하면서,


‘올해도 다 갔구나.’ 길을 걷던 주연은 백화점 앞에 설치된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 하나를 발견했다. 올해 처음 목격하는 트리였다. 시각세포를 거쳐 주연의 마음 속에 ‘크리스마스 트리’와 ‘연말’이라는 단어가 주입되자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우거진 숲의 형상을 하고 있는 주연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오두막에서 불이 켜졌다. 큰 알람 소리에 잠이 깬 누군가가 헐레벌떡 오두막에서 뛰쳐나왔다. 그는 설레는 목소리로 외쳤다. “때가 됐구나!" 눈곱도 떼지 않은 채로 오두막 옆 창고로 달려가는 이 생명체는 주연의 마음 관리자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연의 마음 속 나무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연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푸른 상록수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나무가 병이 나면 주연에게 너 지금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기도 하고, 영감이 가득한 물과 좋은 거름들이 생기면 그걸 나무들에 골고루 뿌려가며 나무들을 키우는 일을 30년째 해오고 있다.




이렇게 반복되는 노동 사이에도 그가 매년 가장 고대하는 연례행사가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연말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는 일. 오늘처럼 때가 되면 연말을 알리는 캐럴송 사이렌이 울린다. 그러면 그는 창고에 가서 낡은 종이 상자를 하나 꺼내온다. 상자의 겉면에는 “추리 용품”이라고 적혀있다. 주연이 할머니 손에 자라 구수한 말투에 익숙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트리가 아니라 추리였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들로 이제 그는 주연의 마음 한복판에 있는 우두머리 나무 하나를 꾸며야 하는 것이다. 추리 용품 상자가 비어있는 일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다. 상자 안에는 일 년을 정리하는 중요한 것들이 들어있었다. 마음 숲의 상태만으로 주연의 삶을 어림짐작할 수밖에 없는 그는 이 물건들을 단서로 주연의 한 해를 추리해왔다. 어쩌면 그래서 추리 용품이라는 이름이 정확한 걸지도 모르겠다.




숲 한가운데 온갖 시간의 증거들이 주렁주렁 달린 이 나무가 바로 누적된 주연의 인생이다. 주연이 고3을 마치던 겨울에는 누가 봐도 오래 써서 손때묻은 보라색 샤프와 낡은 분홍색 폴더폰이 대학 합격증과 함께 노력의 증표처럼 상자 속에 들어있었다. 그것들을 나뭇가지에 걸 때는 무척이나 뿌듯했었다. 물론 그가 늘 만족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에는 눈물 콧물에 푹 적셔져 버린 휴지들이 잔뜩 들어있던 적도 있었다. 너무 초라한 휴지 쪼가리들에 그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그것은 주연이 보낸 시간들의 전부였고, 주연의 파수꾼인 그는 그 슬픔의 순간들도 소중한 흔적이 되길 바라며 얼기설기 찢어 마치 눈송이처럼 나뭇가지에 잘 얹어두었었다. 몇 해가 지난 지금, 그 어설픈 눈송이들은 이 트리를 아주 그럴싸하게 만들어주는 특별한 데코가 되어있었다. 무엇이더라도 나무를 풍성하게 채워주는 모습을 보며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주연이 보낸 시간에 쓸데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그는 궁금함을 가득 안고 이번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무수히 많은 물음표 모양의 마그넷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알아챌 수 있었다. 졸업을 준비하는 주연이 스스로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한 해를 보내왔음을. 내년에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될 물건들이 들어있기를 기대하며 그는 물음표들을 나뭇가지에 걸어보았다. 알록달록한 게 마치 막대사탕들 같아 보였다. 고민의 물음표들로 나무는 전보다 훨씬 생기가 넘쳤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잡동사니들이 오합지졸로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에 불가하지만, 그의 눈에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트리가 무엇보다 빛나 보였다. 올해는 마음에 사시사철 찬 바람이 많이 불었었다. 주연이 한숨을 많이 쉬었다는 뜻이다. 그런 주연이 알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한층 더 풍성해졌다. 나무를 바라보며 언젠가 꿈속에서라도 이 근사한 나무를 주연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멋들어진지 좀 봐보라고. 이게 너의 삶이라고 말해주면서 말이다.




추신. 몇 년 전 할아버지 댁에서 '추리 용품'이라고 적힌 트리 장식품 박스를 보고 상상하며 써봤답니다. 얼기설기 찢은 휴짓조각 역시 할머니가 집에 있던 탈지면 솜을 찢어 올려놓으신 걸 보며 상상해본 것이였고요. 처음엔 그 모습이 조금 우습기도 했는데 보면 볼수록 매력적인 눈송이 같아 보였었거든요. 봄을 맞이하는 한복판에서 오래 전 겨울에 저장해 두었던 글을 발행해봅니다. 올해의 추리 용품으로는 어떤 것들이 담기게 될까요.

작가의 이전글 애도백서를 써볼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