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월요일 아침의 덴마크
얘 너 멀리 떠나는 거야. 별로 안 가고 싶은 거 아냐?
공항 가는 길 차 속에서 엄마의 말에 속으로 뜨끔했다. 실제로 나도 느끼고 있었다. 단지 좋은 자극 속에 나를 놓고 싶다는 열망으로 결정한 여행이 다가올수록 스스로도 너무 무방비 상태로 떠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고 있었다. 정신적인 채비가 하나도 되지 않은 느낌이랄까. 부산 여행도 이렇게는 가지 않았었는데 이래도 괜찮은 건가. 아니나 다를까 겉으로도 티가 났나 보다.
의욕이 팍 꺾인 건 자고 일어나니 찾아온 고관절 통증 때문도 컸다. 허리가 아플 땐 아픈 자세를 피하라던데, 나는 그제 앉은 자세였기에 비행기를 어떻게 타야 하나 근심이 커졌다. 심지어 갑자기 기다리던 회사의 지원 공고도 떴다. 이런 하필. 타이밍도 참.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소식이 더해져서 여행길이 더 부담스러워졌다.
나도 참 나를 알 수 없다 싶었다. 그토록 가고 싶어 했으면서 이토록 떨떠름해질 수 있다니. 변덕스러운 나 자신이 너무 어린 것 같아 싫었고 공항 가는 길에 어떻게든 생각을 고쳐먹으려고 노력했다. 환불되지 않는 비행기표가 차라리 고마웠다. 덕분에 오기 반 강제 반으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엊그제 인사이드아웃 2를 보고 왔는데 아마도 불안이로 인해 터져 버릴 뻔한 순간이지 않았나 싶다.)
물론 지금 되짚어봐도 아찔한 비행이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겨우 참았다. 그래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옆좌석이 다 비어서 새우 자세로라도 몸을 구겨 누울 수 있던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코노미석의 각도는 정확히 내 통증을 자극했다. 난생처음 일등석에 앉기 위해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코펜하겐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직통으로 숙소 근방까지 이어지는 전철을 타고 창밖을 마주하고 나서야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사진으로 많이 봐온 북유럽의 차분한 색감과 종종 차가운 금속 재질의 건축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지나치는 수많은 창문 안쪽에서 노랗게 빛나는 조명들이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시내로 다가갈수록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와 자전거들도 보였다. 지금은 월요일 아침 7시.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며 집을 나서는 시간에 나는 집이 될 곳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이번 여행은 일부러 호스트가 방 하나를 내주는 형태의 에어비앤비를 선택했다. 낯선 곳에서 혼자 있다 보면 타인과의 교류가 그리울 것 같았고, 기왕이면 그 나라의 가정집을 경험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게 고른 첫 숙소는 도심에서 조금 벗어나 한적한 주거 지역에 있는 100년 넘은 작은 아파트였다. 사진상으로 집의 분위기가 가장 마음에 들었었는데, 예약 후 호스트의 메시지도 상냥해서 잘 골랐다 싶었다.
호스트 티나가 알려준 대로 현관문을 잘 찾고, 그 앞의 화분을 들춰 보니 귀여운 악어가 달린 열쇠가 놓여 있었다. 흔쾌히 이른 체크인을 허락해 준 그는 출근하며 열쇠를 숨겨 두고 갔다. 양평에서 종종 식구들끼리 이렇게 열쇠를 숨겨두곤 했어서 악어를 발견하고는 마음이 정겨웠다. 집에 도착했다는 기쁨도 잠시. 마지막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웁씨. 3층까지 캐리어를 계단으로 옮겨야 한다는 사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비좁은 나무 계단에서 천천히 한 칸씩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분명 가볍게 오려고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무거워진 건지. 혹시 모른다며 엄마가 챙겨주신 한식 통조림들을 포기 못 한 과거의 내가 야속했다.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한참의 사투를 한 끝에 내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복도와 부엌은 좁지만 방과 거실은 나름 넓은 평범하고 아늑한 집이었다. 내 방은 복도 끝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여기저기 있는 낙서와 물건들을 보니 딸들이 어릴 때부터 쓰던 방인 듯했다.
방바닥에 대자로 뻗어서 안도감을 누렸다. 어휴 힘들어. 혼잣말을 잘 하지 않는 내게서 타령이 절로 나왔다. 얼마 만에 편히 드러눕는 건지. 새삼 이렇게 마음 편히 누울 자리가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 방이 있다는 것. 5일 간 내가 머물 이 방에는 내가 플라잉타이거에서 사서 방에 깔아둔 것과 닮은 러그가 깔려있어서 더욱 낯설지가 않았다. 안착했다는 느낌. 집의 소중함을 크게 느꼈다.
긴장이 풀리니 당이 떨어지는 신호가 왔다. 먹을 게 하나도 없어서 난감했는데 티나가 감사하게도 침대 위에 수건과 함께 사탕을 올려두셨더라. 마음이 크게 흐뭇해졌다. 고생하며 멀리 떠나오니 사소한 행복을 더 크게 느끼게 된 좋은 일 같다. 귀한 사탕 두 개를 입에 굴리며 집을 살짝 구경하는 동안 차분하고 알록달록한 이 집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밤에 귀가하는 티나와 인사를 나누게 될 시간이 기다려졌다.
한숨을 골랐으니 이젠 본격적으로 코펜하겐에서의 첫날을 시작해 보기로 한다. 월요일에는 대부분의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휴관이라서 오늘은 메인 번화가를 구경하기로. 어디든 골목골목 걸어 다니는 일을 제일 좋아하는 나는 이번에도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코펜하겐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모든 짐을 다 내려놓고 집을 나서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낯선 것, 새로운 것에서 즐거움을 발견하려는 나의 성질에도 발동이 걸린 듯했다. 힘이 들긴 해도 내가 맞이할 것들에 대한 기대감이 새록새록 떠오르며 이번에는 진심 어린 미소가 지어졌다.
찾아두었던 카페로 브런치를 먹으러 가는 길에 우연히 공원을 발견했고,
그곳을 거닐면서 비로소 나 이곳에 정말 잘 왔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