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야."
십여년 동안 누군가의 변화를 지켜보고나서 직장 친구가 한 말이다. 그 누군가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의심많던 수줍은 리더에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 확신에 찬 강력한 리더로 변모하였다. 리더라는 자리는 그 분을 어떻게 단련시켰을까?
고2때 나도 그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반장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의의를 제기했다.
"쟤는 성격이 너무 조용해서 반장에 적합하지 않아요. 이대로 자리를 맡기면 안돼요."
그말을 듣고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야. 누구나 다 할 수 있어."
그 무심한 격려의 말을 듣고 일년간 반장 역할을 했다. 언제나 너무 조용하게 착 가라앉아 기력이 없는 듯한 반 분위기가 내 탓인가 싶기도 했지만 나름 일년간 성실히 반장 역할을 했다.
팀을 이끌고 책임을 지고 목표달성을 하고 방향을 잡아야 하는 역할을 하면서 정체성이 부대낄 때가 있다. 이 역할에 내가 적합한 사람인가, 계속 의심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격,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아예 안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닌 듯 하다. 일이 안될 때는 누군가를 비난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기 때문이다. 자신이 맡은 역할 때문에 자신의 능력, 자격에 대해 줄곧 정체성을 의심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건 정체성의 문제가 아니라 옷의 문제니까.
이직을 고려하고 있던 언젠가 꿈을 꾼 적이 있다. 누군가를 위한 공연을 하기 위해 나는 벽에 걸린 옷 중에 내가 입을 옷을 고르고 있었다. 벽에 걸린 어떤 옷도 마음에 쏙들지가 않았다. 그래도 억지로 옷 하나를 골라서 입고 있던 옷과 바꿔 입으려고 했다. 그런데 입고 있던 옷이 몸에 꽉 끼어 벗겨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 꿈을 꾼후 이직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십여년 넘게 다닌 지금 직장이 내 몸에 꽉끼어 벗겨내기 힘든 옷이라는 걸 알았다.
직장에서의 자리란 결국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공연을 하기 위해 입은 옷과 같을까? 내가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옷에 불과한 것이다. 옷은 나를 보호해주기는 하지만 언제든 바꿔 입을 수 있는 껍질이다. 나는 옷을 입고 역할극을 하고 있을 뿐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그 옷을 입고 그 옷에 적합한 행동과 말을 하기 때문이다.
친구는 아들이 어릴 때 삼십분 정도 곤룡포를 입고 왕 체험을 한 얘기를 해주었다. 왕의 옷을 입고 왕의 대접을 받은 어린 아들은 왕의 몸가짐을 하고 왕답게 걷고 왕답게 말하려고 애썼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은, 그리고 그 자리가 왕의 곤룡포인 것은 그런 의미일 것이다. 입은 옷에 적합하도록 왕 답게 걷고 말하고 행동하고 사고하려 애쓴다.
자신이 맡은 역할이 버거울 때는 그 역할이라는 옷이 요구하는 행동과 말과 걸음걸이를 고려해봐야겠다. 왕관의 무게가 있는 곤룡포를 입었을 때, 수문장의 옷을 입었을 때, 문관의 옷을 입고, 무관의 옷을 입고 있을 때 옷에 적합한 역할을 연기하면 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사용한 말인 "I am that I am"은 "나는 내가 있는 그 존재이다" 혹은 "나는 나다"라고 직역되고 성경에서는 자체로 존재하는 초월적인 존재로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번역된다고 한다.
우리 하나하나 안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나는 (I am) 내가 정의내리는 존재이다(That I am)", "나는 나라고 믿는 존재이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은 내가 자리에 적합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는 노력과 노력에 따른 보상을 통해 나는 이러이러하다하고 믿음이 생긴 결과이다.
이 세상에 편안하고 온전한 내 자리를 갖는 것은 편안하고 온전한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 저절로 생겨나는 존재의 결과값일 것이다. 내가 되어야할 내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 나를 온전히 믿을 때 내 원래 모습도 온전히 드러나리라 믿는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꽃의 영광이 지나가 버린
많은 생명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더 생기롭습니다.
제 할 바를 알기에
오직 인간만이
지는 꽃 아쉬워
마른 꽃버짐 피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