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by 선향

예테보리에 내리자 벌써 저녁나절이었다. 대합실에서 한국보다 여덟 시간이나 느린 시계를 확인하고 그레베스타드로 가는 기차를 탔다.


순한 저녁빛이 가득한 들판에서 말 몇 마리가 뛰어 다니고 있었다. 밤 9시가 넘었는데도 사방은 환하기만 했다. 스웨덴의 여름 해는 한밤중 서너시간 잠깐 사라져서 한 숨 눈만 붙였다 나오는 듯 금방 떠오른다. 아직 빛이 가득한 들녘을 보며 이것이 바로 백야로구나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10시가 넘어 타눔(Tanum)이라는 기차역에 도착하니 실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차에서 만난 미리암이라는 이름의 친절한 스웨덴 중년 여성 한 분이 학교로 연락을 해 주었기 때문에 기차역에서는 교장선생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차 불빛이 실비 사이를 뚫고 길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울라’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분은 왼쪽 눈썹이 하얗게 거의 눈을 내려 덮고 있어 왼쪽 눈이 오른 쪽 눈에 비해 작아 보이는 모습이 어쩐지 유머러스해보였다. 눈썹과 머리가 하얀 은발에다 붉으레한 혈색을 띤 얼굴에 키가 작은 편이셨지만 몸집은 탄탄한 50대 후반쯤으로 보이시는 분이셨다.


울라 선생님은 나를 학교기숙사까지 데려다 주고 앞으로 혼자 쓰게 될 방을 보여준 후 기숙사에 있는 대여섯 명의 스웨덴 젊은이들에게 나를 인사시켰다. 울라 선생님이 돌아가자 나는 곧 내 방으로 돌아와 기숙사 침대에 털썩 몸을 눕혔다.


침대가 두 개인 널찍한 방이었다. 붙박이 옷장에 침대가 둘, 책상이 하나, 커튼으로 가려진 세면대와 샤워시설, 책장 하나가 썰렁하게 놓여 있었다. 일어나 씻고 대강 짐을 정리한 후 불을 끄고 누웠다. 침대 옆에 하얀 커튼을 걷으니 창밖에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푸른 잎사귀 사이 사이에 빨간 열매가 달려 있고 잎사귀에 맺힌 빗방울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크리스마스 리스 장식에 자주 보이는 잎사귀가 뽀죽한 나무였다. 나는 안도감과 감사함에 가득 차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눈을 떠보니 이미 바깥이 환했다. 혹시 늦잠을 잔 것이 아닐까 걱정하며 시계를 보니 5시였다. 일어나 옷을 입고 학교를 둘러 보았다. 기숙사는 하얀 페인트 칠이 된 이층 목조 건물이었다. 창문을 세어 보니 방이 한 스무 개쯤 되어 보였다. 기숙사 오른편에 교실인 듯 보이는 기다란 일층 건물이 있었고 그 건물과 기숙사를 직각으로 끼고 커다란 배나무가 한 그루 선 잔디밭이 있었다. 기숙사 건물의 일 층 왼쪽 마지막 방인 내방 창문 옆에 어제밤에 본 빨간 열매를 단 예쁜 나무가 서 있었다.


기숙사 왼편으로 또다른 기숙사 건물 하나가 있었고 그 옆에 직각으로 다른 건물이 있었는데 울라 선생님이 말해준 식당인 듯 했다. 모든 건물이 나무로 지어졌고 흰색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학교 건물 뒤편으로 교회당의 뾰족한 지붕이 보였다. 잔디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갔더니 교회가 나타났다. 이끼 낀 듯한 청녹색의 지붕이 완만하게 각이 져 첨탑을 이루고 있었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은 독특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교회당 건물 앞쪽에 놀랍게도 커다란 공동묘지가 있었다. 나지막이 두른 돌담을 뛰어넘자 예쁘게 단장한 묘석들이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땅에 넙적하게 깔린 것, 아취 형으로 세운 것, 직사각형 형태로 가로로 눕힌 것, 하얀 비둘기를 대리석으로 새겨 비석 머리에 앉힌 것 등 흰 색과 검은 색의 다양한 비석들이 있었고 저마다 앞에 꽃이 심겨져 있거나 화분이 놓여져 있었다.


이제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색다른 꽃들이 무척 많았다. 아름답게 단장된 공동묘지는 아침 햇살 아래서 고요히 누워 잠자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이리 저리 비석 사이를 돌아 다니며 묘석 위에 적힌 이름과 출생 사망 년도를 읽었다.


한 무덤에는 예쁘게 활짝 웃는 소녀의 사진이 비석 속에 박혀 있었다. 출생 년도와 사망 년도를 보니 70세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무덤이었다. 묘지를 한 바퀴 돌고는 근처의 바위 언덕에 올라 갔다. 거기에는 제비꽃을 닮았으면서도 보라빛 꽃잎 위에 베이지 빛깔의 속 꽃잎을 한 겹 더 가진 예쁜 꽃이 피어 있었다. 바위 위에 서니 멀리 바다와 선착장이 한 눈에 들어왔다.


작은 배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조그마한 선착장이었다. 눈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의 집들은 거의 벽을 흰색으로 칠하고 지붕을 황색으로 칠한 목조 가옥이었고 나즈막한 바위 산들이 바다를 둘러 싸고 있었다.


여름


여름 속엔 거미가 있다

작고 아름답고 당당한 거미

금빛 지푸라기처럼 바싹 마른

햇살 속에 집을 짓고

오후 내내 먹이를 기다리다

여름이 다 가기 전

숨죽인 낮의 의미를 깨닫고 만다

긴장된 여름의 정점

침묵 속에 드러난 자신을 발견한

어느 순간 후.


월, 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