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밭에 씨앗을
뿌려준 이가 있으니

by 선향

선생님


내가 만일 꽃피울 수 있다면

씨를 뿌려 주신 건 선생님이세요

꽃은 지므로서 별은 헤어져서 아름다운 이 밤,

시듬도 헤어짐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선생님의 깊은 마음이

중학교 일학년 계집아이가 끄적인

감상적인 글귀에 머문 것이겠지요


설레임과 혼란만이 가득한

어린 마음을 다듬어 주시며

어느날 선생님은 시 두편을 주셨어요

다 읽고는 찢어버리라 당부하셨지요

대학 시절 홀로 길 잃어

지리산 어둑한 산 속을 헤메이다

맞닥드린 절망과 사랑,

막다른 골목에서만 생은 아름다운 것인가 쓰셨지요.

어머니를 그리는 또다른 애타는 마음과 함께

철없던 저는 선생님의 당부대로 정말 글을 찢어버리고 말았지요


중 3때 전근가신 선생님께서

아릿한 향수로 쓰신 편지글 아래

홀로 젊은 날의 자신을 그리워함인 듯

재호가 - 라고 이름을 쓰셨지요

화들짝 그것이 부끄러워

사춘기의 저는 답장도 하지 못했어요

내 조그만 마음이 당황하고 놀랐지요


여고시절 어느날, 문득 거리에서 마주친 선생님

자전거를 끌고 맞은편에서 오셨어요

곧고 단정했던 지난날의 모습이

벗겨진 머리, 허물어진 표정으로

세월의 스산함을 말해줬지요

유난히 쓸쓸해 보이시던 뒷 모습이

두고 두고 가슴에 남아요


제가 꽃 피울 수 있다면

그건 선생님께서 씨뿌려 주신 거에요

오늘도 되살아나는 그때

내 마음밭 북돋워 주시고

깊고 맑은 시를 써라 얘기하시던

그때 모습 그대로

내 마음에 선생님은 살고 계세요.



여고시절 선생님을 마주친 나이에 제가 와있을 듯 하네요. 어쩌면 그때의 선생님보다 더 많은 나이에 이르렀을 수도 있겠지요. 그때의 선생님의 마음을 짐작해 봅니다. 선생님은 문학청년이었던 젊은 날의 자신을 그리워했을 것이고 저무는 세월 속에 나이들어가는 자신을 슬퍼하고 계셨던 듯 합니다. 세월의 스산함과 신산함이 몸에 사무쳐오는 시절을 선생님이 지나오셨고 내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겠지요.


찰스 핸디가 쓴 '코끼리와 벼룩'에 보면 '황금씨앗'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황금씨앗'은 아주 어린 나이에 존경하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칭찬 혹은 기대감의 표현으로서 선생이 제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이 '황금씨앗'을 마음밭에 뿌려준 사람이 있으면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자신의 꽃을 피우고 싶다는 숨겨진 열망 하나가 언제든 싹을 틔울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그렇게 제 마음밭에 씨앗을 뿌리고 세월이 지나도 계속 돌아오게 만드는 어떤 구심점을 제게 주신 분입니다. '깊고 맑은 시'라고 표현된 그 자리에 대한 갈망이 언제나 있습니다. 어떤 영성인은 강렬한 결핍이 있어야 강렬한 갈망이 지속되고 영혼은 영생을 통해 추구하는 자신의 성장 테마, 정체성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언젠가 10여개의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사람에 대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의 갈망은 이 세상의 모든 언어를 이해하고 모든 언어를 마스터하고 싶다는 것일까요? 어떤 결핍이 있었기에 그런 갈망을 가지게 된 걸까요? 평생을 바쳐 글을 써온 이들은 어떤 강한 결핍과 어떤 열망으로 글쓰기를 지속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나이 들어가며 가꾸는 텃밭 같은, 텃밭보다 좀더 정성드린 정원 같은 글쓰기를 하고 싶습니다. 스토리퀼트 작가인 안홍선 선생님처럼 퀼트를 엮고 들꽃정원을 가꾸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면 울긋불긋 온갖 색깔과 향기가 어우러진 삶을 스스로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 선생님이 마음밭에 뿌려주신 씨앗을 소중히 잘 돌봐야할 것입니다. 쓸쓸히 등 돌려 가신 선생님, 죄송하고도 감사드립니다. 고됨이 다하고 평화와 축복이 가득한 삶을 누리고 계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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