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닿는 조용한 기쁨

존버하기

by 선향

젖은 벤치


비 맞은 벤치가

텅 비어 있다

젖은 의자에

아무도 앉지 않는다

젖고 싶지 않아도

젖어 버린 아침

벤치는 쉬고 있다

수액이 흐르던

옛 시절을 듣고 있는,

비 젖은 벤치는


저 혼자 앉아 있다

900_20250520_123047.jpg 오늘은 비 온 뒤 꽃잎도 앉아 있네요.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뭐야'라고 물어보면 97%의 사람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구체적으로 답을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말이 이해가 가는 것이 나도 오늘 아침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게 뭐야?'라고 물어봤는데 구체적인 대답을 하지를 못하겠더라구요.


조기 은퇴하고 미지의 정글로 나아가기 vs. 꾹 참고 최대한 오래 직장을 붙들고 있기. 50대 중반의 혹은 그보다 이른 나이의 많은 이들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꾹 참고 마음을 삭힌 후 최대한 오래 직장에 껌딱지 마냥 꾹 붙어 있으라고 조언합니다. 마음이 홍어도 아닌데 존버하고 삭히면 결국 이긴다구요. 그렇게 꾹꾹 눌러붙여 삭은 마음이 나중에 제대로 펴지기는 할까요?


변화에 순응하며 조직에 최대한 오래 남아 더 나이 먹은 삶의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소속감을 연장하는 것이 현명하고 올바른 내 삶의 방향일까요? 그 댓가로 좀더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살아갈 기회를 포기하는 것은 아닐까요?


자발적인 퇴사를 하면 많은 이들이 맞닥뜨리는 무료함, 무가치함, 사회와의 단절감, 소득 단절. 뭐 이런 것들이 쓰나미로 닥쳐와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 고민은 아래 위로 능력있는 인재들이 새로 팀에 들어와 변화가 몰아치던 지난 8월 이후 때론 첨예하게 때론 느슨하게 업치락 뒷치락 계속 나를 따라 다닙니다. 더 머무는 것으로 방향을 정했지만 실상 조직에는 내가 그다지 쓸모있고 필요한 인재로 느껴지지가 않습니다. 잉여 인력이 된듯한 이 굴러다니는 뾰죽한 돌맹이 같은 거부감은 시시때때로 내 마음을 긁어댑니다.


'존재증명'을 해야한다는 생각이 있으니 모든 일이 부담스럽게 여겨지는가 봅니다. 직장인에게 존재 증명은 밥값 증명일까요? 아마 모든 이들이 그러하겠지요. 은연중에 나는 이런 식으로 저런 식으로 존재증명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겠지요. 그 존재증명을 해야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우선 스스로에게, 부모님에게, 가족에게, 친지에게, 상사에게, 동료들에게, 팀원들에게, 때로는 친구와 사회에까지 다양합니다.


떠나느냐 혹은 머무느냐의 고민 속에 오랜 열망 같은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글쓰기에 내 탈출구가 있는 듯 느껴졌거든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버리고 나를 믿겠다는 글을 썼습니다. 직장의 유무와는 관계 없이 앞으로 10년이든, 20년이든 '매일 글 쓰는 삶'을 진정으로 원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덧 그 열망도 희미해져있더라구요. 아마 글에 대한 반응을 원하는 마음에 휘둘려 다시 자기 의심이 올라와 글쓰는 목적이 희미해져버린 탓인듯 합니다.


오늘은 정말 비맞은 벤치가 된 느낌으로 나 홀로 한적하게 앉아 있는 하루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야?'라는 질문을 바꾸어 '내가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뭘까?' 라는 질문을 품고 산책을 나가 숲길을 걷습니다. 자기 의심 단계에서 자기 신뢰, 자기 긍정, 자기 존중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야말로 정신적 성장은 더딘 나선형 계단인가 봅니다.


비에 젖은 벤치를 품고 산에서 내려올 즈음 한 목소리가 지나 갑니다. '조직에 네가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가 뭐가 중요하니? 너에게 지금 직장이 필요한지 아닌지가 중요하지.'라고 말합니다. 무게 중심을 바깥에 두어 '현재의 외부 환경이 나를 필요로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무게 중심을 내 내부로 옮겨 '내게 현재의 외부 환경이 필요한지 아닌지'를 물어보라 합니다.


내 안으로 눈을 돌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실상 내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 자기 존중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나 같이 자기 확신이 부족한 이에게 특화된 내 내면의 충고일 수도 있지만 이 목소리는 '나에게 닿는 조용한 기쁨'입니다.


내가 존버해야할 대상은 무엇일까요? 답을 찾아갈 이 공간이 있음에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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