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취미가 없습니다
자기소개란에 “취미”라는 항목이 있으면 항상 고민에 빠진다.
내 취미가 대체 뭘까? 나는 뭘 할 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움을 느낄까? 한 5분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그냥 공란으로 두거나 내키면 '독서'라고 쓰곤 하는데 예전에는 이것저것 꾸며내서 적기도 했었다. 그 거짓 취미에도 공을 들였던 적이 있어서 딱 한 번 빵 만들어본 기억을 살려 '요리'라고 쓴 적도 있었는데, 그 취미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주어진 이후엔 거짓 취미를 꾸며내는 일을 그만 두었다.
일단 취미 적는 데 욕심을 내지 않게 되다 보니, 더 이상 '취미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부담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무슨 진귀한 취미를 적던 그건 그저 회사 세미나 1교시의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에 말문을 트이게 하는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나름의 고심 끝에 '축구'라던가, '필라테스'라던가, '가죽 공예'라던가, '사진', '자전거' 등등.. 이런 것들을 술술 적어내려가는 것을 보면 왜 나는 취미가 없을까? 라는 생각을 떠올려 본다.
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일하지 않을 때 시간을 보내는 것들, 또는 내가 하면서 흥분을 느끼는 것들은:
1) 집안 정리하기
하기 싫으면 취미라고 할 수 없겠지만, 딱히 그렇게 집안일이 싫지 않다. 사람이 머물다 간 공간은 어김없이 엔트로피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하루, 이틀은 설거지를 안해도 괜찮지만 사흘, 나흘이 지나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 지 모를 정도로 개수대가 난장판이 된다. 아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그녀의 동선을 그대로 재연해낼 수 있을 것처럼 양말과 옷가지들이 널부러진다. 나는 이런 아사리판*을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려놓으면서 기쁨을 느낀다. 청소가 끝난 화장실을 보고 있노라면 형언할 길 없는 희열마저 느껴진다.
*몹시 난잡하고 무질서하게 엉망인 상태
2) 위키피디아나 나무위키 보기
주로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글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특히 세계대전과 같은 거대한 연결된 주제에 대해 꼬리의 꼬리를 물고 파고들다보면 한두시간은 화장실 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거기에 집중한다. 딱히 주제를 정해놓고 보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는 것들은 여객기의 사건 사고라던가, 2차대전의 독일이라던가, 냉전시대, 뭐 그런 잡스런 것들이다.
3) 헬스장에서 시간 보내기
어쩌다보니 헬스장 가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퇴근하면 무작정 헬스장으로 간다. 이것도 힘들고 하기 싫으면 취미가 아니겠지만 죽을 힘을 다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보니 그리 힘들지 않고, 도리어 아무리 피곤한 날에도 오늘도 출석 도장을 찍었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어 좋아하게 되었다.
위 행위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마도 혼자 할 수 있고,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며,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서 예시로 든 '남들의 취미'와 나의 '여가 행위'를 비교해보면,
축구 ---- 여럿이서만 할 수 있다.
필라테스 ---- 돈이 든다. 강사를 필요로 한다.
가죽 공예 ---- 돈이 좀 든다. 이것도 강사 없이는 시작할 수 없다. 그리고 산출물이 있다.
사진 ---- 장비빨 세우는데 돈이 많이 든다. 반드시 산출물이 생산된다.
자전거 --- 패달 밟는게 목적이 아니라 장비 사는게 목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투자를 요한다.
그렇다. '취미'가 되려면, 적어도 남들 보라고 만든 자기소개서에 '취미'란이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면 이 빈 칸에 적어내려가기 적합한 것들에는 암묵적인 조건들이 있다.
나는 여럿이서 일하는 것도 좋지만 쉴 때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고, 뭔가에 깊게 파고들어서 그 분야에서 무언가를 생산해낼만한 재능이나 욕심도 없고, 누가 구두쇠라고 한다면 속상하지 않을 정도로 돈 허투루 쓰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그러니까 제발, 자기소개서에 취미 란을 좀 없애주세요 이 인사팀 나쁜놈들아.